사실상의 최후 통첩인 부시 대통령의 유엔 강경 발언 4일만에 이라크 측이 ‘무기 사찰 무조건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이라크 사태가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과 향후 국면을 조망해 본다.
시오도어 루즈벨트는 워싱턴, 제퍼슨, 링컨과 함께 마운트 러시모어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1901년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그는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국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용히 얘기하되 큰 몽둥이를 가지고 다녀라’(Speak softly, but carry a big stick)는 외교에 관한 그의 모토로 유명하다.
요즘 부시의 외교 정책을 보면 루즈벨트의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민주당 일각과 세계 각 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단독으로라도 이라크를 쳐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텍사스 카우보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최근 돌아가는 세계 정세를 보면 백 마디 말보다 주먹 한방이 효과적임을 의심하기 어렵다.
이라크의 무기 사찰 무조건 허용 결정은 후세인이 진심으로 개과천선해 대량 살상 무기 개발을 포기했다는 신호라기보다는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전술적 결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98년 사찰단을 축출한 후 4년 동안 유엔의 경고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라크가 마음을 돌린 것은 부시의 말속에 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북한이 일본 총리를 불러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한 것 또한 절반은 부시의 공이다. 극심한 경제난에다 미국의 강경 대응으로 벼랑 끝에 몰린 김정일로서는 일본이라는 새 창구 개설로 탈출구를 찾는 것이 불가피했고 그를 위해 ‘과거 죄상의 시인과 사죄’라는 북한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라크는 사찰을 전격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예봉은 일단 피할 수 있게 됐다.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내 강경파들은 바로 이 점을 우려해 이라크 공격에 유엔을 개입시키는 것을 꺼려왔다. 유엔이 사찰을 요구하면 후세인은 이를 받아 들이는 척 하고 온갖 구실을 붙여 시간을 질질 끌면서 반 이라크 국제 연대를 약화시키려 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시가 유엔에 간 것은 유일하게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는 영국마저 유엔을 거치지 않은 군사 행동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가 사찰을 수용했다 해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는 것은 속단이다. 후세인은 살아 있는 한 핵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라크가 갖고 있는 화생방 무기가 언제 어떻게 테러리스트 손에 들어가 미국인의 생명을 앗아갈지 모른다는 것이 부시의 확고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부시의 목표는 무기 사찰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아주 후세인을 제거해 ‘악의 축’ 뿌리 하나를 뽑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후세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침공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높다. 부시가 이라크에 대해 내건 조건의 하나가 사찰 수용이 아니라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중단’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랍권의 맹주를 꿈꾸는 후세인으로서는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이 후세인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온갖 ‘모욕적인’ 요구를 해 올 때 언제가지나 이를 참고 견디지 만은 못할 것이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1991년 걸프 전 때도 이라크는 미국의 적수가 못 됐다. 그 후 1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라크 전력은 그 때의 1/3 수준이고 장비도 낙후해 탱크 등 중화기들은 고철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반면 미국의 첨단 무기는 일취월장 목표물을 찾아가 파괴하는 ‘스마트 밤‘(smart bomb)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현재의 이라크를 치는 데는 걸프 전 때 파견했던 50만 병력의 절반도 필요 없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담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생화학 무기와 시가전이다. 어차피 죽게 된 사담이 걸프전 때와는 달리 대량살상 무기를 무차별 살포한다면 미군 희생자가 많이 나고 그렇게 되면 국내 여론도 전쟁 중지 쪽으로 돌아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담의 심복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와 바그다드 시민들이 시내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 걸프전 때처럼 쉽게 전쟁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러나 전쟁을 하기 전 전단과 대 이라크 방송을 통해 생화학 무기를 쓰는 자는 엄벌에 처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사담 휘하에 있었더라도 사면을 약속한 후 대대적인 폭격으로 통신망을 두절시킨다면 이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 절대 다수 이라크 인이 사담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그의 축출을 환영할 것이기 때문에 시가전의 위험도 과장돼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그 후다. 70년대 말 사담이 집권하기 이전의 이라크는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과 쿠르드족이 얽히고 설켜 치고 받는 바람에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시끄러웠다.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한 후 이를 방치한다면 혼란에 휩싸인 이라크는 아프가니스탄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테러리스트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1991년 걸프전 때 아버지 부시가 사담 제거를 망서린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를 아랍 선진화의 모델로 삼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여성 권익 보장과 언론 자유 등을 도입한다면 이번 전쟁은 이라크를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라크는 아랍권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고 8세기 압바스 왕조이래 회교권의 중심이었던 역사적 전통도 있다. 거기다 사담에 의해 대량 살상 무기로 둔갑하고 있는 석유는 도로, 항만, 항공, 통신 등 기간 산업 육성의 재원이 되기에 충분하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다면 그 가장 큰 명분은 대량 살상 무기 제거가 아니라 아랍권의 민주화가 돼야 한다. 남들은 21세기를 달리고 있는 데 아랍권만 중세 암흑 시대로 남아 있는 일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회교권이 테러의 온상이 된 것은 절망에 싸인 젊은이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번영하고 자유로운 이라크는 장기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아랍의 학교’로 만들 각오가 돼 있다면, 그리고 그럴 때만, 이라크 공격은 명분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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