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구/문학평론가·충북대 교수
필자는 재미한인 시인들의 시작품 속에 나타난 중요한 세 가지 문제 거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세 가지 문제 거리란 언어, 자아, 조국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하여 언어, 자아, 조국에 대한 재미한인 시인들의 인식내용이 어떻게 변화돼가고 있는가를 탐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재미한인 시는 그 작품 속에 내재된 의식 혹은 내용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들의 시가 이민자들이 만들어낸 소위 ‘이민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약소국가인 한국을 떠나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불리는 미국 땅에서 창작한 이민시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영어로 시를 창작하려는 이민 1세대들의 노력이 줄고 오히려 모국어로 시를 창작하여 발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초기처럼 모국어에 완전히 예속된 현상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영어를 수용하고 그것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모국어를 미국 내의 독자적인 한 언어로 뿌리내리게 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인다. 달리 말하면 재미한인 시인들은 모국어에 대하여 이전과 다른 수준으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모국어에 예속된 단계를 넘어서 모국어를 선택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재미한인들의 시는 초기단계에 그들은 자신들이 유색인종이자 소수민족이라는 사실 앞에서 피해의식, 약자의식, 분노, 열등감 등을 크게 느끼고 있음이 나타난 이런 인종정체성은 1992년도의 이른바 4.29 흑인폭동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피해의식과 약자의식, 분노와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의식과 역사의식을 갖고 미국 내의 주류사회 속에서 당당한 인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는 쪽으로 변모되었다. 최근에 오면서 인종정체성과 관련된 시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이 겪는 인종정체성의 문제가 다소 완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재미한인들의 시에서 조국과 관련된 시는 그 분량이 가장 많거니와, 그런 만큼 조국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재미한인 시인들에게 조국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토대이다. 그런 만큼 조국에 대한 향수는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들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절제가 불가능한 정도이다. 이처럼 절제가 불가능할 정도의 향수는 초기 단계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나 최근 시에 이르기까지도 그 경향은 계속된다.
그러나 조국을 상상 속에서, 그것도 과거의 조국을 상상 속에서 그려보는 것에는 심정적인 과장과 환상이 끼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국을 직접 방문하고 돌아와서 쓴 시 속에는 조국에 대한 인식이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난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민자의 신분을 가진 재미한인 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시각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게 필요하다. 다음으로 1990년대 이후 남북한 유엔 가입과 재미한인 시인들의 북한 방문이 실현되면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을 조국으로 인식하고 남북한 간 통일을 기원하는 시가 등장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재미한인 시인들의 북한에 대한 시각은 한국 내의 일반인들이나 시인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시각과 조금 다르다. 부연하자면 재미시인들의 시각은 보다 중립적이고 또 열려 있다. 이것은 그들이 미국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북한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길언/한양대 교수·소설가
현대 사회에서 소설의 양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 산업 사회 시민계층의 욕구의 변모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속성을 소설의 운명이고 생리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 향유자의 주체성에 의해서 변모한다는 사실이다. 종합하면 소설의 주변성은 고정된 양식을 거부하는 전복성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역하는 반 욕망 반 효용성, 그리고 시민 계층의 욕구에 의하여 항상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내는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근대소설의 출발은 모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모험은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모험은 계속되기 때문에 끝이 없다. 인간의 삶의 과정도 그렇다.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고 세상에 나와서 차츰 자라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험난한 인생 모험이 시작된다. 그 모험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는 것이며 다시 ‘거기’를 떠나 ‘저쪽’으로 가는 수없이 이어지는 분리와 통합의 과정이다. 이것이 근대소설의 본성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민생활은 바로 소설적이다.
이민자들의 삶의 방식인 꿈과 진정성과 치열성은 이민 소설의 한 방향을 설정해주는 단서가 될 것이다. 이민 생활은 모두가 소설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형상화하는 기법은 이민문학의 한 양식적 특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문학 속의 미주문학이 아닌 세계 문학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민자들의 삶의 양식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삶의 양식과 통하기 때문이다.
첫째 세계문학으로서 이민문학의 자리를 확보하려면, 우선 이민의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진정성과 치열성이다. 그 전제는 이민의 삶에 대한 애정이고 의미 부여다. 즉 미국사회에 편입된 한국인은 미국사회에서 중심부로 진입하기에 앞서 철저하게 주변부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서 그것은 소설적이다.
둘째 한국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민자 문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쓰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터 잡고 살아가는 그 자리를 쓰는 데는 서울보다 훨씬 유리하다. 한국 문단에 편입된 미주문학이 아니다. 물론 민족 동질성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안에 따른 극히 형식적인 부분이다.
셋째 이민문학으로서의 장르를 확보할 수 있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어로 쓴 작품을 다시 현지 언어로 번역하여 미국 사회에 알리는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작품이 생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국 독자를 상대로 한 문학 활동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이민 사회 문학인들이 결속이 필요하며 그러한 문인단체는 실제적이고 유효한 사업을 위하여 협력하고 연구하고 창작해야 한다. 이민소설은 소설의 본성과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이민소설이 세계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원한 나그네 문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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