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한낮의 열기도 그 시간에는 누그러지고 내려앉은 바람은 온 몸을 감미롭게 훑고 지나간다. 몸을 실은 운동화는 걸음을 재촉하고 잡사에서 벗어난 생각은 자유로이 풀려난다.
해와 달이 임무교대를 하는 동안 나는 마주치는 사람들과 ‘하이’하며 인사를 나눈다.
주인을 따라 나온 개들의 생김새도 이 곳을 거니는 다양한 인종만큼 각양각색이다. 두 손을 맞잡은 노부부의 느릿한 걸음걸이에는 여유가, 이어폰을 꽂은 채 책을 읽으며 걷는 여자의 얼굴에는 의욕이 넘친다. 롤러 블레이드를 탄 채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엄마도 보이고 헬멧에 경륜선수용 옷을 갖춰 입고 서너 명씩 조를 지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도 경쾌하다.
제라늄과 장미, 코스모스와 동백이 함께 피어있고 플라타너스와 야자수, 소나무와 선인장도 어울려 있다. 하루에 4계절을 다 지닌 이곳의 날씨가 갖가지 식물들의 화합을 이루게 한다. 젖병 닦는 솔과 분첩처럼 생긴 꽃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젖병 소독하고 기저귀 가느라 허둥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진홍빛 부겐빌리아를 보고 있으면 10여 년 전 살았던 멕시코에서의 추억이 생각나 마리아치의 노래가 그리워진다.
발자국 소리가 나면 도마뱀은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지만 토끼들은 몇 발짝 달아나다 멈추고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가까이 가서 쓰다듬어 보고 싶어도 토끼는 5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토끼는 회갈색 털에 검은 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친근감이 든다. 부지런한 날갯짓으로 몸을 세워놓고 바늘처럼 가늘고 긴 부리로 꽃을 빨아먹는 벌새는 피터 팬 이야기 속의 팅커 벨을 연상하게 한다.
다양한 모양의 집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집의 구조는 어떤지,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질리지 않는 구경거리는 촉촉한 잔디다. 잘 정돈된 잔디는 깔끔한 신사에게서 느껴지는 예의와 품위마저 풍긴다. 까실한 관목만 군데군데 서있는 사막의 땅에 나무와 잔디, 꽃을 심고 타이머에 의해 빈틈없이 작동되는 스프링클러가 미국의 풍요로움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과 거리는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 동네는 ‘터틀 락’ - ‘거북바위’라는 지명처럼 타원형이어서 차도를 따라 한 시간 반정도 걸으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동네 한가운데에는 거북이 등처럼 솟아오른 야산이 있다. 그 위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거침없는 바람을 이용해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청년들은 취미용 비행기를 띄운다. 넓어진 하늘을 둘러보노라면 때맞춰 지기 시작하는 노을이 아래쪽에서 구름의 음영을 비치며 자아내는 빛과 색의 조화가 성스럽다. 그것은 마치 어두움을 대비하라는 경고등인 것만 같아 조심스러운 심정이 된다.
산책코스는 그 날의 기분과 몸 상태에 따라 선택한다. 차도를 따라 동네 한바퀴를 도는 것은 꽤 힘들고 시간 여유도 필요하다. 야산을 먼저 오른 다음 동네 반 바퀴를 돌 수도 있지만 차량이 드문 골목길을 따라 걷는 적이 더 많다.
도중에 있는 공원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체조를 한다. 팔과 다리, 목과 허리를 쭉쭉 펴주면 잠자던 세포들이 눈을 뜨고 기지개를 편다. 윗몸을 뒤로 젖히면 거꾸로 보이는 높다란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시원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주위에 펼쳐진 색색의 생기를 마음껏 들이키고 나면 갖가지 색깔의 요리를 먹고 난 것처럼 충만감이 든다. 하루를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냈어도 허무하지 않고,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도 사라진다. 이 때쯤이면 주황색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달은 점점 제 빛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곳곳에 서있는 거리 이름이 적힌 팻말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다. ‘아침이슬(morningdew)’, ‘햇볕드는 언덕(sunnyhill)’, ‘저녁 산들바람(eveningbreeze)’ , ‘겨울밤(winternight)’, ‘별빛(starshine)’, ‘달 그림자(moonshadow)’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 새 시 한 편이 가슴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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