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시대’다. 동서갈등에 남남갈등만 조장됐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이처럼 흔들린 적이 없다. DJ정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개혁도, 햇볕정책도, 노벨상도 모두 서해에 침몰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부정적 평가 일색이다. 한 한국의 논객은 DJ를 카터와 비교하기도 했다.
카터는 도덕과 인권과 민주주의를 그 누구보다 부르짖었다. 기득권층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카터는 국민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됐다. 통치기능 마저 마비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DJ의 현재 처지가 레임덕 상황의 카터와 아주 흡사하다는 데서 나온 지적이다. 옳은 비교일까.
최악의 미국 대통령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이 나오면 거의 반드시 꼽히는 대통령이 그랜트다. 후버와 닉슨도 자주 거론된다. 카터도 그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에서 거의 F학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이들이다. 그러나 백악관을 떠난후에는 별로 욕을 먹지 않았다. 정반대다. 오히려 하나같이 국가의 원로로서 존경을 받았다. ‘인간’ 으로서 이 전직 대통령들에게 미국민들은 따뜻한 정을 보였던 것이다.
그랜트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다. 그런 그이므로 백악관에 입성할 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랜트 백악관은 그러나 참담한 실패였다. 가장 무능한 정권에, 가장 부패한 시대를 연출했다.
그는 비탄과 모멸감 속에 백악관을 떠난다. 그리고 2년후. 다시 영웅이 된다. 유럽 순방에 나서 왕정에 젖어 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민주 공화국 미국 대통령’으로서 소박하고 고결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데 대한 감동 때문이었다.
‘공인’대통령과 ‘인간’은 별개
그랜트 못지않게 치욕속에 백악관을 떠난 대통령이 후버다. 대공황을 제대로 인식도 못했고, 또 대처도 못한 죄 때문이다. 후버는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국민의 존경을 잃지 않았다.
카터 역시 ‘실패작 대통령’이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인권에 대한 관심은 구호용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또 가난한 자에 대해 지속적으로 쏟고 있는 관심과 행동으로 카터는 ‘전직 대통령의 롤 모델’이라는 찬사도 받고 있다.
왜 최악의 대통령들에게도 미국민은 이처럼 신뢰감을 보이고 있을까.
공인(公人)으로서 대통령과 한 인간으로서 대통령 개인을 구별해 보는 오랜 전통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정치를 하나의 게임으로 본다. 게임에 적절치 못한 역할 수행에는 물론 비판이 따른다. 그러나 그 개인에 대한 감정은 별개다.
실패한 대통령은 정책수행에 실패한 것이지 인간 자체가 함량미달의 실패작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또 다른, 그리고 보다 근본적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마음을 비운 탓이다. 지혜는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 더 풍부해진다. 미련과 집착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권력이 지니고 있는 마성(魔性)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 경험은 인격을 가다듬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과한 입장에서 마음을 비우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워터 게이트 스캔들로 물러난 닉슨이 오랜 칩거 끝에 공적 생활을 재개했다. 상처를 수습하고 외교문제에 초당적 입장에서 충고를 하고 나선 것. 그 불굴의 정신에 미언론은 결국 면죄부를 헌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닉슨이 말하면 사람들이 듣는다.”
DJ가 개각을 단행했다. 여성 총리까지 기용한 이번 개각에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 하는 기색이다. 심지어 여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불만이다.
DJ가 기자회견을 했다.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아태재단의 ‘새출발’을 공언했다. 여론이 들끓고 있다. 민심을 거스르는 ‘저의성 발언’이라는 비난이다.
마음 비울때 사람들이 귀기울여
왜 불쾌해 할까. 왜 여론이 빗발칠까 .’사람의 꾀‘가 엿보여서다. 최초로 여성을 재상으로 기용한 개각이지만 단지 국면전환용 깜짝 쇼로 보여서다. 왜 깜짝 쇼인가. 뭔가 집착때문이 아닐까. 정치에, 권력에 대한 끈적끈적한 미련을 못버린 탓이 아닐까.
이는 그리고 어떤 연상을 낳는다. “아태재단 새출발 선언은 그러면…. 여권 신당설도 그러고 보니…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DJ는 카터를 닮았다’-. 이런 비교론을 내놓은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다. DJ의 현실파악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끄집어 내기 위한 것일 게다. 그러나 잘못된 비교다. 당초부터 마음 가짐이 달라서 하는 말이다.
차라리 카터를 진짜 닮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겠지. 아니, 달라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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