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또 오늘밤인가?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마르고 손에 땀까지 난다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살며, 그 허탈감을 어떻게 달랠 것인지 걱정마저 될 정도로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월드컵 최대 화제중 하나는 단연 ‘붉은악마’다. 경기를 압도하는 일사불란한 붉은 응원에 한국인과 세계가 함께 전율하고 있다. 16강, 아니 월드컵 1승을 바라보던 우리에게 8강을 선사한 한국팀의 승리 뒤에는 ‘붉은악마’의 겁나는 응원이 있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그 ‘붉은악마’(Red Devil)라는 응원단의 이름 때문에 한동안 기독교계에서는 논란이 분분했다.
붉은악마 응원단은 97년초 축구동호인들 사이에 국가대표팀에게 조직적인 응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져 탄생한 단체로, 처음에 ‘그레이트 한국서포터’였던 이름이 명칭공모를 통해 여러 후보중 ‘붉은 악마’로 확정됐다. 이것은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이 놀랍게도 4강에 오르자 외국언론들이 ‘붉은 악령’이라며 경악한데서 비롯됐다.
그런데 몇년동안 문제되지 않던 이 명칭에 대해 월드컵을 몇 달 앞둔 올해초 기독교계가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좋은 이름 다 두고 악마냐”는 것이다. 성경에서 악마(마귀)는 인간을 타락케 하고 평화를 깨치며 파괴를 일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며, 단지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거부감을 느끼므로 다른 이름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2월초 개신교 주도하에 각 종교 대표들이 모여 ‘붉은 악마 이대로 좋은가’라는 공청회를 가졌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개명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연이어 합동기도회, 가두행진, 서명운동까지 펼쳤다. 그러나 ‘붉은악마’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대한축구협회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국민들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 태도였다.
당황한 기독교단체들은 4월말 법원에 ‘붉은악마응원단 명칭사용중단’ 가처분신청을 냈으나 기각됐다. 이들은 심지어 ‘붉은 악마’라는 같은 이름을 애칭으로 쓰는 벨기에 대표팀에도 개명을 제안했다가 “70년동안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던 우리 이름을 갖고 왜 그러느냐”는 일축에 무안만 당했다고 한다. 그 이후 이 문제는 월드컵 열기와 한국팀의 승승장구, 붉은악마의 활약상에 파묻혀 흐지부지된 상태다.
중요한 것은 교계신문을 제외한 한국의 일간지들은 개신교계의 이러한 움직임에 관해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기사감도 못되는 수준의 해프닝으로 비쳐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처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소리가 높았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악마라는 명칭은 탐탁지 않지만 처음 이름 공모때는 가만있다가 이제 와서 바꾸라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자세”라는 지적도 많았고 “축구응원단의 이름을 놓고 종교적인 의미나 상징으로 해석하는건 좀 오버”라는 의견도 있었다.
모든 일이 기독교식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용납하지 못하는 개신교계의 배타성은 좀 유별난 것 같다. FIFA 웹사이트나 한국의 교계신문 게시판에 올려진 극단적 신앙인들의 글 몇개만 옮겨보자.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뒤에서 악마가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악마, 그 이름을 개명하지 않는 것은 제2의 신사참배다. 붉은악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이름 앞에 찬양하며 박수를 보내며…” “축구경기 응원에까지 손을 펴서 역사하는 이 더러운 마귀들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노니 응원단에서 손을 떼고 떠나갈지어다”...
한편 한국에서는 ‘상황 끝’인 이야기를 놓고 아직도 이곳 교계와 목사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다는 사실은 좀 의아하게 여겨진다. 경기가 한창 열리고 있는 요즘 발행되는 교계신문들에는 아직도 이 문제에 관한 기사나 칼럼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붉은악마’의 이름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붉은악마의 명칭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를 축제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논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맞지도 않을뿐더러, 각자 생각이 달라 누구도 가릴 수 없는 이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계가 나서서 외치는 말에 더 이상 세상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귀 기울이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교계 지도자들과 크리스천들은 심각하게 생각해야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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