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강호 폴란드를 2대0으로 주저앉히며 월드컵 본선 데뷔 48년만에 맛본 한국 축구의 감격만점 첫 승리. 내친김에 16강 고지까지 정복하는 데 유리하단 이유 하나만으로 포르투갈을 연호했지만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우승이라도 차지한 듯 환호작약한 건 미국팀.
그래서 기쁨이 샘솟는 가운데서도 마음 한구석에 들러붙은 불안한 혹을 끝내 떼어내지 못한 채 6일 물어물어 태극전사들이 훈련중인 경주시 남산동 화랑교육원을 찾았다. 시간은 오후 2시30분.
태극전사들이 또 한편의 승리 드라마로 대망의 16강 고지에 태극깃발을 꽂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그곳 특훈 캠프는 뜻밖에도 땀 내음 대신 빼곡이 둘러선 푸르디푸른 나무들에서 뿜어 나오는 푸르디푸른 냄새로 가득했다. 그 날 밤 통쾌한 승리 꿀맛을 안겨준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한치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미리 걸음을 재촉하거나 시간을 잘못 알고 나와 주변을 서성이는 한 300명쯤 되는 사람들이 영사기를 다시 돌리듯 부산항 전투(한-폴)와 수원성 싸움(미-포)의 한컷 한컷을 서로 내놓으며 복잡해진 16강행 구도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망과 기대를 주고받을 뿐.
그러나 어느 누구 얼굴에서도 지루함이나 짜증은 한 오라기도 발견할 수 없었고 미리 온 그들처럼 밝은 얼굴을 한 사람들의 발길은 꼬리를 물고 숲속 차도를 따라 꾸역꾸역 이어졌다. 그러기를 약 1시간반. "와~ 온다~!" 엔진소리를 듣기도 전에 누군가 외친 이 한마디에 태극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대~한민국!" 빼곡이 둘러선 아름드리 나무들도 낭랑한 목소리로 후렴 박수까지 놓치지 않고 메아리. "황선홍 파이팅" "명보 오빠 사랑해요" 등 온갖 격문낙서로 뒤덮인 대형 버스의 앞문이 열리면서 가방을 둘러맨 태극전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들의 이름 따라 함성의 노랫말은 바뀌어졌다.
숲속인지라 오후 4시를 조금 넘은 그 시간에 벌써 하늘은 어두워지려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태 기다린 사람들의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제지를 포기한 경비원의 협조(?)로 그 숫자는 오히려 늘어나 약1,000명.
농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운동장을 가로질러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냉탕온탕 러닝과 악의 없는 볼 다툼 약 20분. 그 흔한 움직임마저도 숲속의 관중들에겐 놓칠 수 없는 연극이었고 아낌없는 함성의 밑천이었다. 경북 상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김철환씨(32)는 "게을러서 시간을 못 내고 돈도 제법인 것 같아 표를 사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며 "너무 자랑스러워 가까이서 한번 보려고 왔다"고 속사포를 쏘아댔다.
족구.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 태극전사들이 이윽고 대형을 이뤄 선보인 것은 축구가 아니라 족구였다. 정해성 코치 등이 포함돼 4명씩 6개조로 편을 먹은 붉은 전사들이 ‘엉뚱한 짓’에 몰두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대~한민국" 선창과 나무들의 메아리는 계속됐다. 그동안 고개를 떨군 채 가끔 배를 만져가며 혼자서 러닝을 하는 최용수에게는 어서 빨리 부상(복부)을 털고 독수리(최용수의 별명)의 골 사냥을 보여달라는 안타까움 섞인 격려가 쏟아졌고. 경주에서 자신의 호를 딴 하정서각연구원을 운영하는 윤병희 원장은 박지성 설기현 이천수 등 히딩 사단의 ‘젊은 피’를 가리켜 "히딩크 이 사람 재목을 보는 눈이 확실히 다르다"며 "(한국이) 지금도 많이 달라지고 잘하지만 저 친구들을 잘 다듬으면 다음에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라고 연신 희망 가득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공과 어울리지 않게 수십년 전 월드컵 스토리까지 해박한 축구지식을 내보인 그는 족구장난으로 훈련시간(100분)을 거의 허비(?)한 것에 대해서도 "평소 같으면 죽자살자 훈련해야 하지만 지금 같은 실전기간에는 피로회복과 기분전환이 더 중요하다"고 히딩크식 교육에 100% 고개를 끄덕였다.
슈팅과 미니게임 등 기대했던 축구는 보여주지 않은 채 이날 훈련은 끝. 그러나 선수들이 토해내는 미국전 각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천수는 "미국은 후반전에 체력이 떨어지는 단점을 보였다"며 "감독님 주문대로 측면을 휘젓고 기회가 오면 골로 인사하겠다"고 다짐했고 안정환은 "미국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모두 알고 있다"고 말을 보탰다.
전날 수원 경기장을 직접 찾아 미국-포르투갈전을 관전하고 돌아온 히딩크 감독은 "미국은 에너지가 넘치는 팀이고 공격력과 스피드가 좋은 팀"이라고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특별히 전술상 변화를 주기보다(이미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대비할 것"이라며 이미 필승비책이 준비돼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또 미국의 후반 체력저하를 의식한 듯 "우리는 체력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는 "히딩크 히딩크" 연호 속에 엔진을 켜놓고 기다리던 숙소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주-정태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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