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집 ‘아프리카의 킬링필드, 르완다를 가다
▶ (2)가인과 아벨의 전쟁
만약을 대비해 휴대용 버너를 가져갔지만 르완다의 모든 주유소가 파괴돼 기름을 구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 됐다. 그나마 팔순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신 미숫가루로 겨우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식수도 문제였다. 우간다에서 물을 수입해 팔고 있었지만 한 병에 10달러나 해 비상용으로 준비해간 야영용 정수기를 이용해 식수를 해결했다.
며칠 후 키갈리에서 식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온종일 밥을 굶은 채 취재를 다니다 밤늦게 키갈리에 도착, 입에 맞지도 않는 염소 고기 요리를 억지로라도 먹었더니 힘을 낼 수 있었다.
택시 운전사와 아와, 그리고 살해당한 가파링가 목사의 아들인 임마누엘과 함께 르완다 전국을 순회하는 현장취재가 시작됐다. 나를 도와준 르완다 청년들이 모두 투치족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따라 다니다보니 어느새 나도 투치족 편이 돼 있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인구는 800만명에 이른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데다 국토 대부분이 쓸모 없는 산악지대여서 세계 10대 빈국 중 하나다. 게다가 이 작은 나라에서 생활 양식이 다른 세 부족이 살아가려니 자연히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최대 민족인 후투족은 농경부족으로 인구의 85%를 차지하고, 투치족은 유목민족으로 15% 정도, 그리고 토착부족으로 항아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피그미족이 1% 미만이다. 생김새도 다르다.
후투족은 키가 작고 코도 납작하며 펑퍼짐한 반면, 투치족은 가늘고 긴 골격에다 콧날이 오뚝하고 외모가 준수하다. 투치족 청년들은 자신들이 체격 조건뿐만 아니라 머리도 훨씬 좋다고 자랑했다.
르완다 종족 전쟁은 농경부족인 후투족이 유목부족인 투치족을 일시에 대량으로 학살한 전쟁이니 ‘가인과 아벨의 전쟁’이라 할 만하다. 갈등의 기원은 15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남하하던 유목부족의 한 갈래는 케냐와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산 주변에 정착해 지금의 마사이족이 됐고, 다른 한 갈래는 우간다 남부지역으로 이동해 지금의 앵콜레족이 됐다.
이와는 다른 한 갈래가 부룬디와 르완다에 정착했는데 바로 투치족이다. 이들은 소를 키우며 우유를 주식으로 삼아 건장한 신체와 호전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 특히 마사이족은 하나님이 소를 자신들에게만 주었다는 신앙을 믿고 있는데 문명을 거부하고 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단검 하나만을 갖고도 사자에게 덤벼드는 ‘용사 중의 용사’다. 이들은 신앙 때문에 다른 부족이 기르는 소까지 막무가내로 약탈하는 바람에 아프리카에서도 문제 거리로 꼽히고 있다.
마사이족과 같은 혈통인 투치족도 남다른 용맹과 함께 뿔이 긴 르완다 소를 몰고 남하해 농경부족인 후투족에게 공포와 다름없는 존재가 됐다. 이들은 르완다와 부룬디를 중심으로 투치 왕국을 건설해 400년간 후투족을 지배하게 된다. 성경의 이사야서 18장에는 에티오피아 원주민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나는 땅이여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 경첩한 사자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도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란 바로 투치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중에 르완다는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 후 벨기에령에 편입되었다. 유엔은 르완다와 부룬디를 벨기에의 식민지령으로 편입하면서 카게라강과 키부호수, 부룬디의 탕가니카 호수 등의 지형지물로 새로운 국경을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르완다와 부룬디의 국토가 현재처럼 축소되었다고 한다.
탄자니아 서부지역, 우간다 남부지역, 콩고 동부지역의 일부가 본래는 투치왕국이어서 지금도 이 지역 주민들 일부가 르완다 말을 하고 있다. 또 콩고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투치족은 콩고 내전의 원인이 되기도 해 지금의 콩고, 르완다, 부룬디 등 중앙아프리카 국가들은 독특한 특성을 가진 투치족 때문에 모두 어려움을 겪는 역사적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편 벨기에는 르완다인들의 신체조건에 따라 후투, 투치, 트와로 구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종족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비극의 불씨가 됐다. 식민정권 아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왕족인 투치족의 자녀들만 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당시 창문 너머로 글자를 배운 몇몇 후투족 어린이들은 훗날 정권을 잡은 뒤 르완다의 지도자들이 되었다고 하니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959년 투치왕정이 붕괴되고 1962년 국민투표가 실시돼 다수 민족인 후투족의 카야반다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를 계기로 수백년간 압제를 받아온 후투족이 지배자였던 투치족에 대해 보복 학살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100만명에 이르는 투치족은 인근의 우간다와 자이르, 케냐 등으로 피난해 모진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우간다로 피신한 투치족들 경우 이디 아민 등 독재자의 핍박 아래 온갖 방법으로 인권을 유린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치족과 조상이 같은 앵콜레족 출신의 무세비니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투치족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현재 르완다 대통령 가가뫼 장군은 무세비니의 도움으로 RPF(Rwanda Patriot Frontier)라는 반군을 조직해 르완다 침공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한편 르완다에서는 72년 정권을 장악한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투치족의 귀환을 반대하며 종족에 대한 학대를 더욱 강화하자 결국 투치족은 무력으로 르완다에 돌아온다. 90년 10월 1일 RPF군이 르완다로 침공, 전쟁이 시작됐고 국제사회 또한 르완다 난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94년 4월6일에는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유엔의 중재로 RPF군과 평화협정에 조인하고 돌아오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키갈리 공항에서 저격당해 비행기가 추락, 사망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극렬 후투주의 지도자들은 투치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시작했다. 르완다 라디오에서는 투치족 살생부를 방송하며 학살을 독려하기까지 했으니 전국적으로 학살의 피바람이 불었다.
르완다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 전쟁 미망인 가파링가 사모를 만났다. 가파링가 목사는 학살이 시작되자 가족들과 함께 키갈리에서 90km 떨어진 기타라마라는 소도시의 천주교회로 피난해 숨어 있다가 같은 교단의 후투족 비숍이 보낸 인테라하무이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조차 자신들의 종족문제를 신앙의 힘,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도 극복할 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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