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군사 쿠데타, 최후의 항거자 김웅수 전 6군단장
▶ 특별 인터뷰
“기억해선 안될 불행한 과거사가 선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치적이 불법을 합법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난 16일로 5.16 군사 쿠데타 41주년을 맞은 김웅수 전 카톨릭대 교수(78)의 심정은 착잡하다. 한동안 5월을 잊고 지냈다는 김 전교수는 한국에서 불고있는 박정희 향수와 대권주자들의 행태가 자못 걱정스러워 자신의 기억에서 5.16을 복원시켰다.
“말을 꺼내기 조심스런 시기"라 전제한 그는“이인제씨에 김종필씨, 박근혜씨도 그렇고 5.16 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씨를 업고 대권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5.16이 한국 정치현실에서 아직도 매력이 된다는 사실은 군의 정치 개입을 금기시하는 우리 민도의 수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냐"며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김웅수 전 교수는 5.16 쿠데타 당시 6군단장으로 마지막까지 반란군 진압에 나섰던 장본인. 그는 반혁명 혐의로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이듬해인 62년 석방돼 도미했다. D.C.의 카톨릭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72년부터 93년까지 이 대학의 경제학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국제한국학회 이사장, 한미장학재단 이사, 재향군인회 미 동부지회 고문직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역사의 패자로 기록됐지만 “훗날 누가 옳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변신에 온 힘을 쏟았다"는 김 전교수는 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과 관련해서도“군사 쿠데타 거사에 반대한 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보상되어 군인에 의한 헌법 수호정신이 장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자로 41년을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은거해 있던 그는 16일 메릴랜드 체비 체이스 자택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5.16에 대해 할말이 많았을텐데 그동안 왜 침묵하고 있었습니까.
모두들 정당화만 주장하길래 내 주장 발표를 미뤄왔습니다. 5.16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기상조이며 더욱이 그 반대편에 섰던 본인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은 패자의 변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후광을 배경으로 한 대권 도전이 공공연해지는 혼미한 시국에서 그 쓰라린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또 이제는 내 자식들에 알려주기 위해서도 내가 섰던 장소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기록할 생각입니다.
훗날 내가 쓸 회고록이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참조가 되게 하는 것도 내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5.16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신데 41주년을 맞는 소감은.
여기 동포들도 나와 똑같습니다.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의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웃음)
난 군사 쿠데타를 방지하지 못한 군의 고급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항상 죄의식을 느끼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5.16이 다시 재연되는 상태로 보입니다. 법과 원칙이 무시당하며 국가의 기본이 흔들리고 5.16을 배경으로 한 대권 도전이 공공연해지는 시국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쿠데타를 다시 생각할 시점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5.16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혁명한 사람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국가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5.16 반란 당시 방대한 국가와 군 조직체계가 진압에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면 공산혁명도 가능했습니다. 군, 정치체제 모두 움직이지 못해 쿠데타가 가능했던 겁니다.
-경제개발이란 공(功)이 쿠데타, 독재라는 과(過)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치적이 불법을 합법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부조리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수법, IMF를 초래한 재벌적 경제제도와 지역주의는 군사정권이 심어놓은 것입니다. 과연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이 아니었다면 오늘 정도의 경제와 사회 질서, 그리고 국민의 가치관을 이룩할 수 없을 것인가 의문을 해보게 됩니다.
-5.16의 역사가 주체들의 시각에서만 그려지거나 회고록을 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왜곡됐다는 평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 책이나 회고록은 별로 못 읽어 봤어요. 장도영 장군(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망향’을 보니‘나는 최선을 다했다’하고 반란군을 진압할 직할 지휘부대가 없다는 걸 들었는데 그건 핑계입니다. 전군이 총장 지휘 아닙니까. 비상시 수도권 3개 사단을 가동할 수 있습니다. 총장은 야전군 사령관에 진압하라는 명령조차 안 내렸습니다. 유혈사태를 우려했다는 것도 그래요. 공산군과 대치하는 상태에서 유혈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장 총장의 교훈에서 보듯 그만큼 군의 지휘체계가 중요합니다.
-박정희 장군과 쿠데타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까.
박 장군이 청렴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50년대 말 내가 육군 군수참모부장으로 재직할 때 신설되는 부산의 군수기지 사령관에 박정희 장군을 추천했습니다. 취임식 참석차 부산에 내려갔는데 박 장군이 느닷없이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이대로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내가“군인들이 혁명을 한다고 나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반문하자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를 떠본 거라 생각합니다.
-5.16으로 군복을 벗고 고난에 찬 유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박정희를 미워합니까.
긴 눈으로 볼 때 어려운 시련을 겪었지만 난 복된 사람입니다. 5.16이 없었으면 승승장구, 백성들의 어려움을 몰랐을 수도 있었어요. 친구나 동료들이 정권을 움직일 때 난 미국서 대학 1학년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생업까지 맡아 고난의 인생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내 친구들 벌써 은퇴했지만 난 75세까지 강의를 했습니다. 늦게까지 사회에 공헌한 것도 덕입니다.
5.16때 내가 취한 동작이 국민을 위해 옳은 행위임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그래서 군사정권에 가담을 안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 장군에게 감사해야 하지요.
난 누가 옳았나를 증명하기위해 내 변신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사후에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는 안장권 소송을 지난해 내셨는데.
아직 한국에서 한번도 연락이 없었고 어떻게 되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앞장선 건 아니고 또 국립묘지에 묻히고싶은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명예회복을 위한 탄원서를 낸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처리됐습니까.
YS가 5.16을 군사 쿠데타로 정의하면서 쿠데타에 희생된 군인들을 복권시키는 일이 우선 아니냐는 생각에 탄원서를 제출했던 겁니다. 내 개인보다 당시 관련된 피해 군인 전체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것인데 법적 근거 등을 들어 어렵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명예회복 돼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탄원서를제출하지 않았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 박정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았습니다. 2백억원을 지원해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는데 그런 분에게 탄원서를 낼 생각은 없습니다.
요즘 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보상을 해주는데 민주화운동의 근본이 군사 쿠데타와 직결돼 있습니다. 그에 항거한 이들을 인정 안 해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차별하면 이 나라에 훗날 또 쿠데타가 일어나면 군인들 중 누가 막겠습니까.
■김웅수 장군 프로필
1923년 외가가 있는 경북 김천의 지례면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충남 논산.
한 살이 되기 전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난 조부와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 6세까지 하얼빈 근교 독립군 부락에서 생활.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중 4년때 여순의 일본 예과로 옮김. 일본의 경도제국대학 입학해놓은 상태에서 학도병으로 출전. 일본 예비 사관학교를 거쳐 소대장으로 복무중 일 동북부 야마카타에서 해방 맞음.
45년 11월 귀국,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5월 소위로 임관. 수도사단 참모장을 거쳐 8사단 부사단장 재임시 한국전쟁을 맞았으며 2군단 참모장을 거쳐 휴전 당시는 2사단장.
야전군(1군사령부) 창설을 주도했고 54-55년 미 캔사스 참모 지휘대학 유학. 육군 작전국장, 군수 참모부장을 거쳐 국방대학에 입교했으며 61년 6군단장 재임시 쿠데타와 직면.
쿠데타군 진압에 실패한 후 강제전역 당했으며 반혁명혐의로 복역하다 62년 풀려나 도미. 시애틀의 워싱턴 주립대에서 대학 1년생으로 입학. 66년 워싱턴 D.C.로 옮겨 72년 카톨릭대에서 경제학박사학위 취득 후 교편 잡음.
72년 워싱턴에서 반 유신 시위 주도로 귀국 계획 포기.
93년 퇴임 후 고향인 논산의 건양대에서 5년간 후학들을 지도하다 99년 재 도미.
부인 박실모 여사(75)와 1녀 3남을 두고 있으며 강영훈 전 총리가 그의 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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