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뉴스가 온통 미국을 연결고리로 전개되고 있다. 대통령 아들 이야기가 우선 그렇다. 그 스토리의 출발점은 미국에서의 호화판 유학이다. 그러다가 ‘한국내 비리에 깊숙이 관련돼 있다’는 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에 볼 일 있으면 간다. 별 볼일 없어도 한가하면 간다… 국내 정치용으로 사진찍기 위해서 가지 않는다." 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노무현씨의 말이다. 이 발언에 이어 "(미국에게) 한국 대선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노무현씨의 말은 아니다. 특보라는 사람이 미국의 조야에 대해 한 말이라고 한다. 그 특보라는 사람이 해임됐다는 속보도 전해진다.
별개의 뉴스다. 그런데 뭔가 한가지로 묶여 있다는 느낌이다. 노무현씨 발언은 상당히 반(反)미적이다. 미국에 한(恨)이라도 맺힌 듯한 인상이다. ‘쓸데없이 그 나라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하는 짜증스런 반발에서 그런 심정이 엿보인다.
노무현씨의 멘터격인 DJ의 아들과 관련된 뉴스는 그러나 그 배경이 상당히 친미적이다. 아니 미국과 유착된 느낌마저 준다. 대통령의 아들은 팔로스버디스의 호화주택에 칩거, 워싱턴의 보호막 속에서 여론의 소나기를 피하려는 인상을 주어서다.
둘다 여권 핵심과 관련돼 나온 뉴스다. 그러니 아이러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타박스(Starbucks)가 북경에 상륙했다. 이는 바로 문화적 제국주의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고유의 다도(茶道)가 소멸될 위기를 맞게돼서다…문화적 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란 무엇이냐. 어떤 것이든 미국의 것이 미국 국경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건 모두 문화적 제국주의다. 코카콜라도, 미키 마우스도… 미국과 관련해 싫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문화적 제국주의의 이름을 붙이면 된다." 퍽 오래전 월스트릿 저널에 실린 논평의 한 부분이다.
문화적 제국주의란 말이 처음 등장한 건 1970년대다. 칠레의 좌파 지식인 아리엘 도르프만이 미국 문화의 세계화 현상을 ‘문화적 침탈’(侵奪)의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나온 말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의 문화는 식민주의 착취자의 문화라는 인식이 제3세계를 사로 잡았던 시절로, 공산주의 소련이 체제경쟁에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때가 70년대다.
’문화적 제국주의’란 용어는 말하자면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오늘날 ‘문화적 제국주의’란 용어는 그러나 냉전적 시각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른 정치적 목적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한 국가 사회가 지니고 있는 ‘피해자 심리’(Victim Mind)를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교묘한 포퓰리즘적 수법과 맞물려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랍 세계가 맞고 있는 정치·사회적 불안을 이슬람 과격파는 모두 서방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세계화와 이에 저항하는 부족주의(Tribalism)와의 관계는 어느 부분 이 논리로 설명된다. 공개성과 폐쇄성, 열린 사회와 닫힌 체제와의 대결구도가 바로 그 관계라는 것이다.
한국 뉴스로 이야기를 돌리자. 미국과 관련된 이 상반된 뉴스는 무엇을 의미할까. ‘여권내에서도 상충하는 좌·우파 멘탈리티의 한 측면일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인의 대미인식은 항상 이중성을 보여 왔다는 게 한국 학자들의 지적이다. 구한말 때부터 형성된 미국관으로 그 하나는 화이(華夷) 양분론에 따라 미국을 오랑캐로 보는 시각이고 반대 편에는 미국을 문명부강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미국관이 8.15, 6.25, 5.16, 광주사태 등을 격으면서 좌우대립의 시각으로 노출됐다가 결국은 제국주의로 고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우대립의 단면으로 보는 시각은 옳다. 그러나 냉전적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개방성과 폐쇄성의 관점으로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 사회가 지닌 폐쇄성은 종종 거친 민족주의로 표출된다. 이와 함께 대두되는 게 반미주의다. 문제는 폐쇄성이 반미주의로 분출될 때 그 해악이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싫든 좋든 미국을 떠나서 현실을 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미국은 맹방이지 결코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 현실에서 최선이란 있을 수 없다. 엄혹한 국제정치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최선보다는 ‘차악(次惡·Lesser Evil)의 선택’이 정치이고 외교다. 이상(理想)만 말하는 정치, 유토피아만 설파하는 정치는 말의 장난이기 십상이다. 지나치게 포퓰리즘에 의존하는 무책임한 행위다.
그건 그렇고 이러다가 미국에서 살아 죄송한 세상이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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