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 최진훈씨(57)는 의사생활 30년이 넘는 내과 전문의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음악인이기도 하다.
명문 서울 의대와 줄리아드 음대를 나와 내과 개업의와 오케스트라 지휘자 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그에게서는 어느 것이 본업이고 부업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의사란 직업을 통해 생활을 꾸려나가지만 그의 일과 중 음악에 쏟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만 진료를 한다. 그것도 하루종일이 아니다. 보통 아침 6시쯤 병원에 들러 입원환자를 돌본 후 9시부터는 20년 이상 개업중인 브롱스 코압시티에 있는 오피스에서 환자를 진료한다.
진료시간은 오후 1시까지 고작 4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에는 음악에 매달린다. 금요일에는 다른 곳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고 주말에는 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니 음악을 빼고는 그의 생활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최씨의 음악세계의 분신은 자신이 뮤직 디렉터와 지휘자로 있는 뉴욕한인 챔버 오케스트라(Korean Chamber Orchestra of New York)이다. 15년 전인 1987년 그가 음악도들을 모아 조직하여 그 해 카네기홀의 와인홀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이래 매년 봄, 가을에 한 차례씩 연 2회의 정기연주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창립일이나 외국인 재단의 베니핏 모임에 초청 연주를 하는 것을 포함, 1년에 4회 정도 연주회를 갖는다.
처음 15명으로 시작된 이 오케스트라는 현재 단원이 50명이고 입단 자격이 음악석사 이상인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로 성장했다. 그는 진료시간이 끝나면 다음에 연주할 곡의 악보를 읽고 다른 오케스트라의 CD를 구해 그들의 연주를 연구하고 단원들과 함께 토론한다. 그래도 연주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찾지 못할 때는 줄리아드의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하기도 한다.
최씨는 서울의대를 나온 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뉴욕에 이민했다. 곧바로 브루클린 메소디스트병원에서 인턴과 내과 레지던트를 했고 브루클린 주이시병원에서 풀타임 티칭 스탭을 했다. 그 후 79년 맨하탄에서 개업했고 2년 후엔 브롱스의 코압시티에 오피스를 또 열었다.
지금은 코압시티에서만 진료를 하고 있다. 의사로서 그의 삶은 성공적인 삶인 셈이다.
그런 그는 의사 보다 더 긴 음악과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조부는 1920년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최원순 선생이고 조모는 동경여의전을 나온 여의사였는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사람은 바로 그의 할머니였다.
그는 의대 예과시절에 이 피아노 실력으로 서울의대 합창단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하는 사람은 많고 반주자리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프렌치 혼을 배우기 시작했다. 프렌치 혼은 오케스트라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악기이므로 그는 서울대 음대생들로 조직된 서울대 팝스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되어 방학 때는 지방 연주여행까지 따라 다녔다.
대학 졸업후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훈련소에 들어간 첫날 예배에서 찬송가 반주자로 뽑혀 군대에서는 군인 교회 반주자가 되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군예대에 배속되어 후보생들에게 군가를 가르치고 군가를 편곡하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도 교회 반주자, 성가대 지휘자를 계속했다. 지금도 그는 뉴저지 그레이스한인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음악 생애에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발생했다. 미국에 와서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니 한국에서 듣던 음악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래서 음악의 명문 줄리아드를 방문해 보았다.
그 당시 프렙스쿨 학생이 프렌치 혼을 부는데 한국의 정규 연주자 이상의 실력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음악의 한계를 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개업의로서 바쁜 생활 중이었지만 1986년 줄리아드 음대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빈센트 라 셀버 교수 밑에서 지휘공부를 했다. 학교 수업시간이 아닌 시간에만 의사로서 진료를 하는 풀타임 학생, 파트타임 의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87년에는 음대생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뉴욕한인 챔버 오케스트라는 처음부터 특별한 3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다른 오케스트라가 소홀히 하는 바로크시대의 고전음악, 즉 바하, 헨델, 모짜르트, 베토벤 초기까지의 음악을 연주하며 둘째는 대원 안에서 독주자를 선발하며 셋째는 상업적인 연주회가 아닌 예술적 발표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지난 15년간 이 원칙을 고수해 오고 있다. 공연에 소요되는 경비는 기부나 협찬, 일부 매표로 충당하고 있다.
그를 찾는 환자는 90% 이상이 미국인들인데 이들 환자들 중에 그의 음악 후원자들이 많다. 어떤 환자는 기부금을 내고 어떤 환자는 입장권을 사주기도 한다. 의사가 지휘를 한다니까 처음에는 반신반의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쯤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일단 연주회를 보고는 예술성에 감탄한다고 한다.
최씨가 이처럼 많은 시간을 음악에 할애하는 이유는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는 무한정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연주를 잘 하고 못 하고는 연주자 자신이 잘 알고 그보다도 청중이 더 잘 안다고 한다. 그래서 청중이 무섭다고도 했다. 새로운 곡을 접할 때마다 막막한 감이 들지만 하나 하나 풀어가면서 해결해 나갈 때 그 보람은 무엇에 비할 수가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시간이 돈인 의사이지만 음악에 쓰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미국에 와서 뒤늦게 음대에 입학을 한다고 하니 부인이 앞으로 어떻게 할려느냐 하고 심각하게 따졌다고 한다. 그래서 먹고 사는데는 지장 없게 하겠다는 말로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인 국정기씨도 서울 문리대 시절 서울대 팝스 오케스트라의 멤버로 활동한 음악도였고 최씨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고 하니 남달리 그의 음악을 이해했을 것이다.
최씨는 한국에서 의과대학에 다닐 때도 다시 태어나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꿈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그는 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의 음악인생은 아메리칸 드림 정도가 아니라 내세의 소망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그 만족감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돈이란 생활하는데 여유 있을 정도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최씨의 이 말은 돈을 버는 것만을 아메리칸 드림으로 좇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화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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