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전 4월 29일 레지널드 데니 구조한 바비 그린
10년 전,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해 많은 사람들에겐 영웅이 되고, 소수에겐 배신자가 된 그날 밤의 일을 이야기하는 바비 그린(29)은 지금, LA 동쪽의 교외지역인 리알토의 자기 집 소파에 앉아 있다.
10년 전의 그날, 4.29 폭동이 막 시작되던 시간에 그린이 앉아있던 소파는 사우스 센트럴 LA의 어머니 집에 있었다. TV에서는 한 흑인이 벽돌로 이미 길 위에 축 늘어져 있는 백인 트럭 운전사 한명의 머리를 찍고 또 찍고 있었다. 반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두 번째 벽돌이 내려가는 장면을 보고 그린은 "됐다"는 생각에 소파에서 일어나 뛰쳐나갔다. 자기가 흑인이고, 온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날 로드니 킹을 구타한 LAPD 경찰관 4명이 무죄 평결을 받은 것에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당장 현장으로 가서 레지널드 O. 데니를 폭도들의 손에서 구해냈다.
그날의 그 결정은 아직도 그린이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신조이자,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분명한 기준이며, 온 가족이 자랑스러워하는 일로, 그의 집 거실에는 그가 받은 훈장과 상패 14개중 7개가 걸려 있다. 그 일은 또 매일 그가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꼭 한번씩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폭동이후 회복의 상징이 된 그가 LA를 떠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데니도 마찬가지로 LA를 떠났다. 아리조나주 레이크 하바수에서 좋아하는 뱃놀이를 실컷 하고 있는 데니는 1992년 4월 29일에 관련된 모든 인터뷰를 거부한다. "과거사를 되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그의 전처 셸리 몬테즈는 말한다.
폭동 당시엔 그린도 트럭운전사였다. 파트타임으로 근근히 먹고 살았다. 지금은 근육질의 우람한 몸매에 말수가 적은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는 자신의 과거의 그 3시간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일생에 너무도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피부색은 겉보기일 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옳은 일을 함으로써 흑인들이 모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똑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나는 폭도들하고 다릅니다. 내가 데니의 목숨을 구한 것은 그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91년 3월 3일,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패는 현장을 아마추어 사진사의 비디오 카메라에 잡힌 LAPD 경관 4명에 대한 재판이 끝날 무렵, 그린은 장차 아내가 될 베라와 동거하고 있었다. 몇 달전, 딸 애쉴리(10)를 낳은 베라는 LA의 웨스트사이드에서 사무원으로 일했고 그린은 시간당 13달러에 시멘트 트럭을 몰았지만 계절직이라 베네핏도 없었다.
그날 오후, 한 짐을 부리고 어머니 집에 들른 그는 형과 아들 에릭(17)과 함께 TV 앞 소파에 앉아 경관들에 대한 무죄 평결에 화를 내다가 어둠이 내리고 있는 플로렌스와 놀먼디 교차로 장면을 보게 됐다. 에릭에게 금방 오겠다고 말하고 현장까지 5분쯤 걸려 도착한 그는 뛰어가 데니를 그의 트럭 운전사칸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던 레이 유이예를 도왔다.
그린이 데니를 밀어넣고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막지 않았다. "아마 나를 그의 트럭까지 몰고 재미를 보려는 나쁜 놈으로 여겼을 겁니다" 곁에 타고 있던 유이예조차 그렇게 의심했었다.
유이예는 한 10분쯤 걸려 다니엘 프리먼 메모리얼 하스피털까지 가는 동안 내내 데니의 다친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줬고, 또 다른 2명은 자기 차에 비상등을 켜고 데니의 트럭 옆을 달리면서 유리창이 깨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그린에게 방향을 지시해줬다.
데니를 병원에 내려놓은 다음, 이 지역 트럭업계 사정에 밝은 그린은 데니의 트럭을 제 소속된 곳에 주차시키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세사람은 그린의 이름도 모른채 "검정 옷을 입은 젊은이"라고 기억했지만 현장 상황을 세세히 잡아 실황 중계한 TV 뉴스 헬리콥터 덕분에 4명은 하룻밤 사이에 영웅이 되어버렸다. 필 도나휴 쇼를 비롯, 각종 매체에 보도됐다.
처음부터 그린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원했다. 동네 사람들의 너무도 엄청난 적의가 두려워서였다. TV에도 자신의 실루엣만 사용하게 했을 정도였는데 데니를 구타한 용의자 4명이 체포된 이후에는 더욱 두려움이 커졌다.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재판이 진행된 데니의 케이스는 로드니 킹 케이스 못지 않은 커다란 긴장요인이었다. 재판이 시작될 무렵, FBI가 보호 혹은 이주를 원하는지를 물어왔다. 그린은 이미 여러차례 협박을 받았었다.
1993년 8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재판정에 출석한 그린은 자기가 목격한 것, 데니를 도운 이유에 관해 진술했다. 배심원들에게 그린은 같은 트럭운전사로서 데니가 맞을 때 마치 자기 자신이 맞는 것처럼 아팠다고 말했다. "꼭 죽을 것 같아서 도우러 갔습니다"
몇달동안 고민하던 부부는 데니를 때린 주범 2명에 대한 판결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무죄방면, 죄목 약화되는 두 사람을 보며 또 한번 정의가 실종됐다고 느낀 것이다. "내 생각에 그는 잘못했습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입니다" 모기지 페이먼트가 싸고, 90년대 이후 LA와 캄튼을 떠난 흑인들이 모여 사는 리알토로 그들은 이사했다.
그린이 매일 출근하는 회사는 ‘세믹스’, 전에는 ‘트랜짓 믹스트’라고 불렸다. 바로 데니가 폭동 당시 근무했던 회사다. 트럭을 몰고 이 회사의 LA 정류장으로 갈 때마다 그린은 그날 데니가 마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낀다. "무슨 인연인지, 내가 구해준 사람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다니 멋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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