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망대
▶ 신기욱 스탠포드대 사회학/국제학 교수
남가주 한인 대학생을 위해 마련된 장학금 수상자 심사위원을 몇해 한 적이 있다. 선정 기준 중의 하나인 이들의 에세이를 읽는 것은 퍽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코리안 아메리칸 학생들의 마음속 깊이 담긴 생각과 뜻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에세이의 주제 중에선 92년 4.29 폭동과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 단연 압도적이 었다. 부모들의 비즈니스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경우도 있고 폭동의 참혹한 장면을 TV를 통해본 경우도 있지만 4.29가 자신의 정체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데는 별 이견이 없었다.
미국이라는 ‘위대한’ 나라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4.29의 비극은 ‘아메리칸 딜레마’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코리안으로서 미국 땅에서 사는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 것이다. 또한 왜곡된 보도를 일삼는 미디어를 보면서 문화적 파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커뮤니티의 나약함을 보면서 정치력 신장의 절실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4.29는 80년 봄 광주항쟁과 유사한 점이 많다. 4.29가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정체감과 커뮤니티의 장래에 대해 생각케 하였다면 많은 한국민에게 있어 5.18 광주항쟁은 한국에게 있어서 미국의 존재는 무엇이고 민주주의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80년대를 휩쓴 민주화 운동은 5.18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386세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광주의 희생을 민주화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킨 건 분명 한국인의 힘이고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5.18이 이처럼 한국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듯이 4.29도 한인 커뮤니티를 더욱 성숙 시키는 씨앗이 되어야 한다 . 4.29를 그저 과거의 한 불행한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이를 미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 우리에겐 ‘폭동’으로 불려지는 4.29가 흑인 커뮤니티에선 ‘의거’나 ‘항쟁’으로 불려질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도 있다.
사실 난 주저하면서 이 글을 적고 있다. 4.29 폭동의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니고 이들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100분의 1도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이 단순히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었듯이 4.29도 사우스 센추럴이나 코리아 타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코리안 아메리칸 모두의 문제이고 숙제이다.
지난 10년간의 세월속에 슬픔과 고통을 딪고 일어선 우리 커뮤니티는 자랑할 만 하다. 또 한흑 커뮤니티간의 이해를 증진하고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단체를 만드는 등의 노력를 한 것도 무척 고무할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타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배우려는 노력은 아직 미진하고 ,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사는 라틴계 종업원들에 대한 차별적 태도와 행동도 고쳐야 할 부분이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치력 또한 아직 멀었다. 지금도 ‘본국 정치’를 위해 공들이고 있는 자칭 커뮤니티 리더들이 많지 않은가.
’아메리칸 딜레마’를 ‘아메리칸 드림’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도 또 피해서도 안되는 우리 모두의 몫이며 각고의 노력과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5.18이 386세대를 만들어 냈듯이 4.29도 우리 커뮤니티의 새로운 리더쉽을 만드는 씨앗이 되어야 한다. ‘아메리칸 딜레마’를 체험하고 극복하며 미국땅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의 드림을 실현해 가는 429세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4.29의 희생과 슬픔을 승화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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