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망대
▶ (이기영/ 한국일보 뉴욕지사 주필)
미국에서는 은행 융자를 해주거나 사업상 거래 상대를 찾을 때 신용도를 중요시한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크레딧 카드나 렌트 등 돈을 제 때에 갚아왔나, 남의 돈을 떼어먹은 적은 없는가, 파산을 한 적은 없는가 등으로 신용을 파악한다. 앞으로 잘 하겠다고 주장하거나 약속하는 것은 신용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행적으로 신용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취직을 할 때도 과거의 행적이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교수나 과거 직장 상사의 추천서를 요구한다. 본인의 말 보다 그 사람을 겪어 본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는 것이다. 물론 미국인들은 추천서를 아무렇게나 써 주지 않고 사실대로 쓰기 때문에 추천서가 신용장으로 통한다. 연방 정부의 주요 직책에 사람을 채용할 때는 이 정도로 신용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FBI가 연고지를 찾아가 관련자들을 일일이 인터뷰하는데 예를 들어 이혼을 한 사람일 경우 이혼 동기와 과정 등을 추적, 그 사람의 인품까지 조사한다.
또 학생들이 대학입학 허가를 받으려면 SAT 점수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성적도 좋아야 하고 특기와 봉사 등 과외활동도 많아야 한다. 이런 종합적인 관찰을 통해 그 학생이 대학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고 나아가서 성공적인 사회인이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한다.
이렇게 사람을 평가할 때는 과거의 행적을 중요시한다. 현재는 과거의 집적이기 때문에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알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서는 깊이 신뢰하지 못하지만 오래 동안 사귀어 온 친구 사이는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오각성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개과천선이란 말이 있고 거듭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또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다. 한때 조양은이라고 하는 조직폭력배 두목과 조세형이라는 대도가 과거를 씻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화제를 모았었다. 그러나 그 후 조양은은 폭행죄로, 조세형은 절도죄로 다시 철창 신세가 됐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한다는 말도 과거 행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지금 한국에서는 차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열전이 벌어지고 있다. 선거운동은 TV 토론이나 대중유세 등 주로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인데 정치인 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가 적격자인지 쉽게 가릴 방법이 없다. 더구나 정치인의 말은 대부분 거짓말일테니 말의 진위 조차 가리기가 쉽지 않다.
흔히 후보를 평가하여 선택하는 기준으로 정당의 정책정강을 들지만 그것도 신뢰할만한 기준은 되지 못한다. 정책과 정강은 유권자들의 표를 모으기 위해 구미에 맞는 것이면 모두 끌어모아 놓은 것이 때문에 좋지 않는 것이 없다. 한정식의 밥상에 있는 반찬들처럼 골고루 모아놓다 보니 기업가에게도 좋고 노동자에게도 좋은 식으로 모순 투성이가 되기 쉽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조차 선거후 정책이나 공약이 제대로 실천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러면 후보자 사람 자체를 놓고 평가 판단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과거 행적을 들춰내는 일이 되고 만다. 어느 나라든 대통령 감이라고 하면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이미 국가와 사회에 상당한 공헌이 있는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의 지도자, 전쟁영웅, 사회운동 지도자 또는 의회 지도자가 대통령 후보 감으로 오르내린다. YS와 DJ는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지만 야당 지도자로서 대통령 후보가 되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후보들은 과연 후보로 나설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문이 든다. 리더쉽도 없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한 두번 한 경력으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래도 이 사람들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 그 중에서도 과오가 적고 생각이 올바른 사람을 가려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과거의 행적을 밝히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몰아치는 바람이나 깜짝쇼는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여 후보의 진면목을 바로 볼 수 없게 한다. 선거에 나온 후보들은 유권자를 현혹하기 위해 누구나 바람과 깜짝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런 속임수 보다는 과거 행적으로 후보자를 판단해야 한다.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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