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면 이길지 모르겠다. 한인 징용피해자들이 일제때 자신들을 강제노역시켰던 다이헤요시멘트회사(옛 오노다시멘트)를 상대로 캘리포니아주 LA지법(LA카운티 수피리어법원)에 제기, 이미 2년6개월째로 접어든 징용배상소송을 두고 하는 얘기다.
지금까지 이 소송에 대해 ‘이길 수 있겠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은 분석의 근거는 LA를 관할하는 가주 고법이 5월1일로 예정됐던 ‘정재원 vs 오노다’ 케이스에 대한 특별항소심(Writ) 일정을 갑자기 변경, 연기한 사실이다. (특별항소심이란 지법이 최종판결에 앞서 일부 현안에 대한 판결을 내렸을 때 이에 불복하는 원고나 피고의 청원으로 열리는 항소심으로 드문 경우지만 지법당판사의 요청으로 열리기도 하는데 이번 경우는 지법판사의 요청에 따른 것.)
단순한 행정적 문제일 수도 있는 일정 변경을 놓고 어째서 "승소…" 얘기가 나올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번 소송을 둘러싸고 전개된 상황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이번 집단소송은 원래 LA민사지법에 제기돼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에 지법판결 후 누군가 항소할 때 고법이 개입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이번 소송을 가능하게 한 가주특별법이 연방헌법 위반"이라고 피고측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LA지법이 "누가 이기든 어차피 고법으로 갈 사건이니 가주특별법의 위헌성 문제에 대한 고법의 입장을 먼저 듣는게 낫다"면서 특별항소심을 요청, 고법이 개입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일본의 동참을 확고히 하기 위해선지 어쩐지 피고측 입장을 두둔하며 "재판을 기각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법정조언서를 지난 2월11일(이하 발송서명일 기준) 국무부 법률고문과 연방법무차관보 명의로 접수시켜 피고측의 승소를 굳히려 했다.
5월1일로 특별상소심 날자가 잡히자(원래는 4월30일이었다가 하루 연기) 원고측 변호인단은 고법이 ‘신속한 재판 → 가주특별법 위헌 판결 → 재판 기각’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라 보고 수렁에 빠져드는 재판을 건지기 위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이 시점에서 정의를 지키려는 한인 및 중국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법원에 전해졌고 캘리포니아주 입법부와 행정부의 강력한 입장표명이 뒤따랐다.
정의회복위원회(위원장 정연진)의 활약을 바탕으로 LA한인회(회장 하기환)·LA한인상공회의소(회장 최명진)·한미연합회(사무국장 찰스 김)는 중국 및 유대 커뮤니티와 연대해 법정조언서를 접수시켰다(3월6일). 한·중·유대 커뮤니티는 이 과정에서 미국 최고의 헌법학자인 어윈 체머린스키 교수(USC법대·헌법)와 잭 골드스미드 교수(시카고법대·국제법)라는 월척을 낚는 쾌거를 일궈냈다.
이들은 이에 앞서 클린턴 행정부에서 연방법무부 민권국장을 지낸 당대의 변호사 빌 란 리도 얻었다. 여기에 허브 웨슨 가주하원의장·잔 버튼 가주상원의장 직무대행·길 세디요 가주하원 민주당 간사·아담 쉬프 전 가주상원 법사위원장과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 등 쟁쟁한 의원들의 연기명이 들어있는 법정조언서(3월8일), 빌 라키어 가주법무장관의 명의로 된 가주정부의 법정조언서(3월11일)가 잇달아 법원에 접수됐다.
체머린스키와 골드스미드 두 교수가 이론적 틀을 제공한 법정조언서 하나만 해도 LA고법으로서도 가볍게 보지 않았을 터에 가주 행정부와 입법부까지 발 벗고 나섰으니 조용하면서도 고차원적인 한인들의 정치력이 빛나는 장면이다.
사실 특별항소심에서 어떤 판결이 나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나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가주 고법의 이번 움직임은 분명히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한인사회는 이 같은 변화와 이 소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관심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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