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는 빗나가고 황사(黃砂) 중공군은 밤사이 슬그머니 물러갔다.
삼월의 일요일 아침, 세수를 말끔히 끝낸 서울 시청 광장은 세월이 비껴간 듯 반세기전 모습을 느끼게 한다. 아무리 보아도 건너편 센터빌딩이 왼쪽으로 돌아선 듯 보인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필자가 서울을 떠날 때 먼지를 뿌리며 솟구치던 재벌 호텔의 등장으로 일어나는 착시 현상일까,
필자가 센터빌딩에서 근무하던 때는 이십에서 삼십세로 들어선 시절, 아래층 은행 소공동지점 근무할 때 큰아들을 얻었고, 이층 국제부로 옮겨, 부장대리 진급, 작은 아들을 보았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와 그때의 추억을 헤아리며 빌딩 정문을 끼웃거려 본다. 굳게 잠겨 있었다. 건물을 함께 드나들던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시절 외국인 회사 무역회사들이 상주, 세련된 남녀들이 드나들었었다. 죽음만이 아니다. 시간은 이 모든 우리시대의 것들을 거두어 갔다.
한참을 문 앞에서 기다림의 나무되어 서 있었다.
어린 시절 펄벅의 <북경에서 온 편지>를 읽으면서 머리에 떠오르던 배경은 아버지의 고향 부여 세파니 이었다. 지금도 그 소설의 장면은 거기다.
그러나 눈에 안개가 서려 훔쳐내며 읽은 조창인의 <가시고기>의 배경은 엉뚱하게도 센터빌딩 언저리다. 가시고기 암놈은 알을 낳은 후엔 어디론가 달아난다. 수놈 혼자 남아 알들에게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혈투를 한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알들을 보호한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곤 아비 가시고기를 버리고 저들끼리 떠난다. 홀로 남은 아비 가시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 버린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뿐이고,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 한 건 바로 아빠예요.
내가 없어지면 아빠는 슬프고 또 슬퍼서, 정말로 아빠 가시고기가 될지도 몰라요."
시인 정호영은 화가인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백혈병에 걸린 열 살짜리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진 것 모두를 눈까지 빼어 아들 치료비를 만든다. 그에게는 지나간 세월 중 어느 부분을 뚝 분질러 거기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먼 훗날을 기약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고픈 여인 여진희가 있다. 아들은 완치되나 자신은 간암 말기 육 개월 시한부, 아들을 프랑스에서 다시 결혼한 제 엄마에게 보내고, 아이와 함께 보내던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여진희 옆에서 죽는다.
"진희 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이야.... 그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은, 죽어도 아주 죽은 게 아니래."
투병 부문만 빼면 아들을 세상아이들이 당연히 누리는 평범 속으로 끼어 넣고 싶었던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소설은 픽션이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성은 지닌 허구다. 작가에겐 오래 사귄 친구가 있다.
불치병의 아이를 둔, 아이는 어때? 하고 물으면 좋아지고 있어 라고 대답하는 친구, 쉽사리 좋아 질 병이 아니다. 친구는 딱 한번 말했다. "내 희망이 무언지 알아? 아이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대신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야 , 하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대신 할 수 없어. 그게 참 견디기 힘들다. " 견디기 힘들다는 말에 이 소설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주는 것. 받으려고만 몸부림 친 세월이 백년이면 무엇하나,
황사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바다의 고기들의 좋은 영양소, 논밭에도 좋은 걸음이 된단다. 미움 중에도 사랑이 있다는 말이다.
깨끗한 풍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햇빛, 유리문을 열지 않고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센터빌딩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다. 소설 그 픽션처럼.
모든 것은 쓰잘 데 없는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심하는 사랑은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심하고 욕심 품고 질투하는 잡다한 일상 중에서 눈을 감아 보이는 게 있다면 그것이 사랑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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