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은 9.11 참사가 발생한 지 6개월을 맞은 날로 미국에서 대대적 기념행사가 열렸다.
백악관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이 열렸고 월드 트레이드센터(WTC)의 잔해가 남아있는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날 밤부터 WTC 상공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두 줄기의 푸른색 조명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무슨 기념일이라고 하면 대개 1주년부터 기념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 다음부터는 매주년을 따지기도 하지만 5년, 10년 단위로 크게 기념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실버 애니버서리와 골드 애니버서리라고 하여 25주년과 50주년을 대단히 성대하게 치른다. 그런데 9.11 참사는 1주년도 되지 않았는데 1개월, 1백일, 6개월 등 날 수로 따질만한 날에는 기념식과 추도식이 열려 지나친 감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9.11 테러참사는 미국인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어떤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매일 매일 미국인의 뇌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이며 또 지워져서도 안될 사건일 것이다. 미국인들은 지금까지 "진주만을 잊지 말자"고 말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9.11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뉴요커들은 WTC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973년 완공된 110층 높이의 쌍둥이 빌딩은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특징짓는 구조물이었다.
멀리서 바라본 맨해턴의 야경이 하나의 거대한 배라고 한다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앞 돛대이고 WTC 빌딩이 더 큰 뒷 돛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배를 끌고 가던 돛대가 부러졌던 것이다.
테러범들이 WTC 빌딩을 공격한 것은 미국의 부와 자본주의, 자유경제의 상징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격을 가한 테러범들도 WTC 빌딩을 이런 상징물로 보고 공격했고 테러를 당한 미국인들도 이 테러가 단순히 빌딩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부와 문명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WTC는 단순한 빌딩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처럼 이 테러 여파로 미국경제가 한동안 휘청거리기도 했다.
지금 WTC 참사 현장에서는 밤낮 없이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건물의 잔해를 제거하는 작업은 이번 겨울의 따뜻한 날씨 덕분에 예상외로 빨리 진척되어 오는 여름이면 모두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새로 빌딩을 지어야 하는데 어떤 건물을 짓느냐가 앞으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새 건물의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WTC 임대권자는 지난해 종전 건물의 절반짜리 높이로 여러 개의 건물을 짓겠다는 의사를 시사한 바 있다. 그리고 인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또다시 테러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해서 WTC의 원상 회복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뉴요커들의 의견은 원상 회복과 저층 건축으로 의견이 갈려 있는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 볼 때 WTC의 원상 회복은 어려워질 것 같은 전망이다. 미국의 국부와 자유경제의 상징물이 테러범들에 의해 붕괴된 후 그들의 뜻대로 자취를 감추게 될 지경인 것이다. 미국이 테러가 겁나서 고층건물을 세우지 못한다면 테러가 겁나서 미국의 국부를 확장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WTC 자리에는 최소한 원형 이상의 고층 빌딩으로 30년 전 원형 보다 더 발전된 첨단건물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테러로 억장이 무너져내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고 미국의 번영을 다시 선포할 수 있다.
건물을 어떻게 짓는 것은 개인의 소관이지만 WTC의 재건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연속선상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건물주 개인뿐 아니라 미국의 재계와 일반 시민들이 힘을 모으고 공적 자금이라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9.11 테러 참사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갖고 마음에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참사를 이겨내고 더 큰 번영을 구가하는 확실한 상징물이 필요하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보이는 WTC 자리에 위용을 자랑하는 원형 건물을 복원함으로써 뉴요커와 미국인의 자긍심을 되찾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본보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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