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속담 가운데 "누구든지 천국 가기는 좋아하나 죽음을 말하기는 싫어한다"는 내용이 있다. 인간들은 준비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탄생도 결혼도 준비한다.
그러나 가장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많은 한인 가족들이 사랑하는 이의 준비 없는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당황하고 허탈해 한다. 최근 장례준비를 하는 한인 중년층들이 늘고 있다.
9.11 테러 참사 이후 유언장 작성, 묘지구입 등 사후 안식처를 준비하는 한인 중년층들이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 한인사회의 신 풍속도로 자리잡고 있는 한인 중년층들의 장례준비 실태를 알아본다.<편집자주>
■현황
"제 나이는 35세, 제 아내는 32세지만 장례 준비를 끝냈습니다" "부모님 묘지를 준비하면서 우리 부부와 자녀들까지 아예 가족묘지를 마련했습니다" "자녀들이 재산분배로 등돌리는 것은 막기 위해 미리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최근 영원한 안식처를 준비하는 한인 중년층(30-40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지난해 발생한 9.11 테러 참극 이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
이들은 묘지구입 또는 유언장 작성 그리고 유언장 작성과 묘지 구입뿐만 아니라 시신처리에서 안장 방법 등 토탈 장례준비까지 마치고 있다. 이들의 직업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영업자나 전문인들이 대부분.
장례준비를 하는 이유는 각양각색. 아무리 이민생활이 바쁘고 고단하며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고는 하지만 직, 간접으로 한인가정에서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얻어지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준비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경우가 대부분.
"고생하다. 살만하면 죽는다"는 한인 40대들의 돌연사로 인해. 9.11 테러처럼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한 사망의 영향 때문에. 그리고 젊은이나 중년층의 어처구니없는 사고 사망이나 횡사 등이 한인 중년층이 장례를 사전에 준비하는 주요 동기들이다.
Laurel Grove Cemetery 유기락 장묘문화상담인은 "최근 30-40대 중년층 한인들이 전화로 장례문의를 하는 건수는 하루 평균 10-20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며 "그 가운에 직접 찾아와 장례준비를 하는 한인들은 10% 정도"라고 말한다.
그는 또 "미국의 사망자 통계 가운데 55%가 50세 이하, 40%가 40세 이하로 나타나 듯 장례준비는 노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며 "예전과 달리 한인 중년층들의 장례준비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지고는 있지만 미국 사람들에 비해서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라고 말한다.
■사후 안식처를 구입하는 한인들
자신과 가족들의 사후 안식처를 준비하는 중년층 한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뉴욕과 뉴저지 한인들이 주로 찾는 가족묘지들이 분양초기 노인층에 국한된 것과 달리 점차 중년층뿐만 아니라 젊은세대 한인들에게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30-40대 중년층의 묘지 구입이 늘고 20대 젊은세대들의 전화문의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 같은 현상은 묘 자리 구입을 또 다른 개념의 투자로 인식하는 경향 증가, 이 땅에 뿌리 내린 이민 1세대 부모의 묘를 선산으로 삼아 후손들에게 효 사상을 전해야 한다는 인식확산 그리고 부모나 가족의 갑작스런 사망 대비 등에 의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묘지 구입을 미리 준비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갑작스런 배우자 사망 때 슬픈 감정으로 발생할 수 있는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또한 미리 준비하면 분할도 가능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 그리고 배우자가 따로 묻히는 경우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고, 살아 있을 때 부부가 함께 좋을 곳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뉴저지 포트리에 거주하는 현성균(37, 가명)씨는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의 공원묘지에 우리 부부 묘지 2기를 2,400달러 정도에 구입했다"며 "친구로부터 묘지를 미리 구입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이상하고 꺼려져 망설였는데, 사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부부가 따로 묻힐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사후에도 아내와 함께 안장되기 위해 결정했다"고 말했다.
유기락 장묘문화상담인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우리 육신이 마지막으로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영구한 것이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의논하여 좋은 곳을 미리 정해두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며, 통계적으로 7년을 주기로 땅 값도 두 배로 상승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뉴욕에 한인의 가족묘지 개념을 지닌 ‘무궁화동산’이 있듯이 최근 뉴저지에도 한인들만을 위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명명한 지역이 있으며, 이 곳에는 묘지 1000기 가운데 200기 정도가 분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언장을 작성하는 한인들
최근 유언장을 작성하는 한인들이 늘고 있다. 이 역시 연령층이 예년의 60세 이상에서 30-50대로 낮아지고 있다. 관계 변호사들에 따르면 최근 몇 년 사이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한인들이 20% 정도 증가하고 있으며 연령층도 중년층으로 낮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유언장을 작성하는 한인들이 증가하는 이유는 우선 한인사회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이 늘고 있기 때문.
브로드웨이에서 도매업을 하고 있는 장길수(43, 가명)씨는 9.11 테러 참사를 보면서 자신도 갑작스럽게 사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해 10월 변호사를 찾아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자신이 유언장 없이 사망하면 미성년 자녀들의 몫인 생명보험금과 재산을 18세가 넘을 때까지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내가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유서 내용에 자녀들의 몫을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아내가 사용할 수 있다는 항목을 첨부했다고.
대형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승균(45, 가명)씨도 올 들어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가 변호사를 찾아가 유언장을 작성한 것은 자녀들이 재산분배와 상속세 때문. 그는 "오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가는 순서는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며 "내가 갑자기 죽게되면 자녀들이 재산분배 문제로 사이가 나빠 질 수도 있다는 우려와 유언장 없이 사망할 경우 내야하는 막대한 상속세를 막기 위해 변호사와 상담 후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말한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유언장 작성은 미국생활의 지혜다. 변호사들에 따르면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놓으면 절세는 물론 정부가 임의대로 재산을 처분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또한 유언장 없이 사망했을 경우 자녀들이 18세 미만이면 법정이 관리인을 선정하게 되고 법정관리인이 유산을 빼돌릴 수 있는 불이익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한편 최근 유언장 작성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한인들은 미리 죽음을 예상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적 차이로 유언장 작성에 소홀한 입장이다.
■한인들의 올바른 장례문화를 위해
한인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사망 이후에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그나마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는 한인들도 묘지구입 이나 유언장 작성이 전부이다. 근본적으로 한인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 자체를 꺼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례로 연로한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한인들 대부분은 부모의 묘지를 준비하는 것이 오히려 큰 죄나 짓는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들이 생존해 계실 때 그들이 원하는 곳과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장례준비를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불안의 요소를 없애는 것으로 효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한인 노인들도 자녀들이 미리 갈 곳을 예비해 둘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올바로 알리기보다는 자녀 눈치 등을 살피고 있는 실정. 자녀들에게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는 노부모들은 자신의 장례준비를 자녀들에게 올바로 알려서 미리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것. 이를 위해서는 한인 가정들이 장례문화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추는 것이 선결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결국 한인사회에서 올바른 장례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한인 가정들이 사후 안식처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계몽과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과 교육을 담당할 한인들이 전무한 실정이라, 한인 장묘문화상담인 양성이 더욱 시급한 실정이다.
유기락 장묘문화상담인은 "한인사회의 장례문화 수준은 묘지구입만으로 모든 장례준비를 마친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교회나 노인회 등에서 무료 상담이나 세미나를 하고 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앞으로 많은 한인들이 이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창흠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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