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이락, 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한 후 한반도 정세는 차가운 한파에 휩쓸리고 있다.
북한이 반미태세를 강화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파웰 국무, 럼스펠드 국방, 라이스 보좌관, 블레어 태평양 미군사령관이 잇달아 북한을 비난 내지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기회 있을 때마다 한미 공조에 이상이 없다면서 햇볕정책을 밀고나온 한국정부의 입장이 딱하게 됐다.
정부 안에서는 이번 사태에 관해 강온 양론으로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강경론은 부시의 대북 강경론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고 온건론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미간에 이처럼 견해 차이가 심화된 책임이 외교팀의 무능과 안일한 대응 때문이라는 여론이 비등하여 정치권에서는 개각 몇일 밖에 안된 외교팀을 모두 갈아치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관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단순히 외교팀의 무능이나 대응 부족 때문이 아니다. 한국의 햇볕정책과 미국의 대테러정책이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므로 외교팀의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테러국가와 테러조직에 공급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DJ정부는 이러한 잠재적 위협요소는 무시한 채 남북관계의 개선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한국은 남북관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미국을 아예 멀리하고 북한에 접근하면서 외교 다변화, 시장 다변화란 명분으로 탈 미국화를 공언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시 미국의 국가방위체제를 반대한 한러 공동성명의 해프닝이나 최근 한국에 팽배되어 있는 반미감정이 이런 탈미국화 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이 좋게 생각할 리는 없을 것이다. YS가 취임사에서 동맹 보다 혈맹이 중요하다고 하여 한때 한미관계에 냉기류가 흘렀고 이 때문에 IMF사태 때 미국의 협력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말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런데 DJ정부는 미국을 따돌리고 남북정상회담을 향후 남북관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인상을 주었다. 다행히 클린턴 행정부는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자제해 왔으나 부시행정부는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였다.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말을 해 왔으나 한편으로는 미국이 배제된 납북 접근에 제동을 걸었다. 대북관계에서 강경대응으로 나오다가 이제는 “햇볕정책의 성과가 무엇이냐”는 볼멘 소리도 하고 있다.
DJ정부가 남북관계에서 탈 미국화를 염두에 둔 것은 1세기 전 한국이 중·러·일 3국의 세력균형 속에서 독립을 추구했던 것과 같은 방식일 수 있다. 미국과 거리를 두는 대신 중국 및 러시아와의 거리를 좁혀 이들 3국의 세력균형 속에서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백년 전과 지금은 국제정세가 다를 뿐 아니라 한국이 처한 조건이 전혀 다르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50여년간 한미관계의 산물이며 미국은 유일무이한 세계 중심세력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한국은 북한이라는 또 하나의 한국, 그 속내를 알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엄연한 존재를 상대하고 있다.
부시의 북한 비난은 테러지원국이 될 수 있는 북한에 대한 경고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을 도외시 한 남북대화에 대한 제동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는 미국의 태도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북한이 대테러전쟁의 목표가 된다면 한반도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DJ의 햇볕정책은 많은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차기 선거에서 새 정부가 들어설 경우 어떤 형태로든지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차라리 햇볕정책을 시작한 DJ 스스로 이 정책을 재검토하여 고칠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여 차기정부에서 손 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정책을 만들어 놓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미간의 공조체제를 확고히 하고 북미관계를 완화하는 길도 바로 이 방법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한미간의 냉기류를 공연히 외교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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