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문 뒤에 불이 붙었나 했다. 그러나 금방 노을임을 알았다.
노을이 내리기 시작하며 온 동네가 붉게 젖어 가는 가 했더니 설핏 붉은 기가 사라지며 검은 장막이 쳐졌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잠시 붉은 얼굴을 보여주었다가 스러져 버려 그 아슬아슬함이 더욱 극치미를 준다.
석양이 비칠 때 뉴저지 방향으로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는 일, 루즈벨트 섬에서 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반사되는 노을을 바라보는 일, 막 가로등이 켜지는 시각 맨하탄 방향 톨 부스 앞에서 노을진 하늘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나 아닌 것 같다.
노을은 나를 입 다물게 하고 정신을 앗아가 버린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너무 몽환적일 때 황황히 창을 닫고 자물쇠까지 채우기도 한다.
노을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받쳐 오르는 것은, 사무치는 것은 유한한 인생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붉은 빛을 발한 후 스러져 가는 인간의 삶, 노년기에 느끼는 허무·쓸쓸함·비애·미련,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제 몸을 태워 용해시킨 관용과 화해, 너그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는 가끔 안부 전화를 해주고 편지를 보내주시는 80대, 90대 할머니·할아버지가 있다. 그들은 아주 옛날부터 개인적으로 알았거나 4-5년 전 취재를 하다가 알게된 분들이다.
어깨가 나날이 굽어져 가면서도 손수 김치를 담그시는 84세 된 시어머니, 튜브로 음식을 공급받는 형편이면서도 입양아의 친부모를 찾아주려고 애쓰는 87세 홍 할머니, 매주 5일 골프를 치며 운전도 하는 96세 최 박사님, 늙은 모습 보이기 싫다고 방문은 사절하나 늘 예쁘게 단장하고 계신 96세 김 할머니, 그리고 멀리 한국의 산사에서 집필 생활을 하고있는 고교 은사 김 선생님, 그 외에도 여러분이 젊은 나를 챙겨주신다.
무려 40년 정도가 아래인 나는 연말연시에 "카드 보내야지", "연하장 보내야지" 생각만 하고 말았는데 노년기를 붉은 노을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이분들은 전화를 하시거나 카드를 보내주셔 나를 송구스럽게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다보니 쓰자마자 곧 배달되는 이메일에 익숙하여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서 붙이는 재래식 방법은 도통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좋은 내용의 이메일이라도 그것을 복사하여 보관하게 되지는 않는다.
일정기간 보관했다가 메일이 가득 차면 클릭 한 번으로 지워버리니 나중에는 안부 편지가 왔었던가? 안 왔었던가? 기억조차 흐릿하다.
그러다 보니 편지나 카드 빚이 자꾸 늘고 있다.
나 역시 이메일 보다는 직접 손으로 쓴 카드 받는 것을 좋아하면서, 편지가 오면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약속 시간이 남았을 때, 버스나 전철 안에서 보고 또 보면서도 나는 정작 못쓰고 있는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예쁜 카드와 편지지를 사다가 내가 가진 가장 좋은 펜으로 정성을 다한 편지를 써야겠다. 멀리는 수십 년, 짧게는 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분들이 아마도 지상에서 받는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른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는 편지를 보낼 수가 없다. 보내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받아서 읽을 수가 없다. 지금 살아 계신 분이라고 그저 ‘잘 계시겠거니’ 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한다.
오는 12일은 구정이다. 미국에 오래 살아도 한국에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사람은 음력 설날을 무시할 수 없다.
노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달려가 얼굴을 보여주고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전화로 그리운 목소리라도 한번 더 들려드리자. 그리고, 편지를 써보자.
자녀들도 함께 동참하여 서툰 글씨라도 크고 명확하게 써서 할아버지·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자. 아마 노부모님은 자녀의 손길이 닿은 편지라고 네 귀퉁이가 닳도록 품안에 넣고 다니며 읽고 또 읽을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노을지는 창가에서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편지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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