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파원 코너]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경제전문잡지 포천의 베서니 맥린 기자는 요즘 잘 나가고 있다. 공영방송 PBS에서 앵커 짐 레러가 사회를 보는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CNN과 NBC 뉴스 쇼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31살의 여기자가 이처럼 매스컴에 각광받고 있는 것은 미모가 뛰어나고 멘트 중간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잘 받아서가 아니다.
또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에서 터득한 금융시장 지식이 명쾌하기 때문도 아니다. 최근 파산한 에너지그룹 엔론의 회계 장부 조작 여부에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기자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갑자기 부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맥린 기자는 열달전에 엔론의 회계장부 조작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엔론 주가가 너무 비싸지 않은가"라는 글을 실었다.
그녀가 취재를 하는 도중에 엔론 고위간부들이 총동원돼 기사를 막으려 했고, 케네스 레이 당시 회장은 포천지 편집인에게 전화를 걸어 "엔론이 잘못되면 반사이익을 얻을 사람들의 정보로 기사를 써선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포천지는 엔론 경영진의 전방위 공세에도 불구, 맥린 기자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녀의 기사는 당시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기사가 잘못됐다거나, 엔론의 방해공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뉴욕 증시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엔론의 주가는 99년에 50%, 2000년에 90%나 폭등, 뉴욕 월가의 기관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식이었고, 뉴욕 월가 애널리스트들이 모두 나서서 엔론이 혁신적인 에너지 회사라며 주가를 띄워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포천지 맥린 기자의 기사가 먹혀들기 어려웠고, 그 틈을 비집고 엔론은 회계감사회사 아서 앤더슨과 짜고 장부를 조작하고, 주가를 띄워 올리는 장난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월 마침내 엔론의 회계장부 조작 사실이 터져나오면서 그녀는 탁월한 기자로 평가를 받았고, 매스컴에서 서로 모셔 가는 존재가 되었다.
뉴욕 증시는 최근 2년 간 가라앉았지만, 그에 앞서 10년 동안 상승장세를 지속했다. 뉴욕 증시의 장기 호황은 미국 언론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주식투자를 하는 미국인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미디어들은 경제뉴스를 확대했고, 역으로 늘어난 경제뉴스가 증시 상승의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뉴욕타임스는 하나의 섹션으로 모자라, 월드 비즈니스 섹션을 별도로 만들었고, 월스트리트 저널도 섹션과 페이지를 확대했다.
1983년 CNBC가 경제전문 케이블채널로 투자자를 사로잡자, CNN도 증시전문 채널 CNNfn을 방영했고, 블룸버그 TV는 아예 밤에도 금융시장 동향을 전하고 있다.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는 저서 ‘비이성적 탐닉(Irrational Exuberance)’에서 "미디어가 비즈니스 뉴스를 확대한 것이 90년대 뉴욕 증시 과열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IMF 이후 시장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미디어에 경제기사가 부쩍 늘어났다. 일간지들이 경제 섹션을 늘리고, 방송사도 경제뉴스 코너를 신설했다. 따라서 경제 기사가 전체 증시는 물론 개별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이런 와중에 최근 언론사 간부와 기자들이 특정 기업 주식을 매입, 대가성 기사를 쓴 일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기자에 대한 신뢰도가 이처럼 땅에 떨어진 적이 없고, 주변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든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한가지 굿뉴스를 들자면, 한국에서도 이제 시장의 힘이 커지고, 법의 논리와 형평성이 강화됐다는 사실이다.
시장의 발전은 미디어의 기사에 의해 주가가 비이성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강화된 법의 논리가 과거 같으면 ‘이 정도쯤이야’ 하고 치부해버릴 구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다.
작금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론 게이트는 자본주의 시장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할 홍역이고, 이번 일은 언론과 기자 스스로가 크게 자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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