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후보 지지하면서 간판은 달리 걸어 잡음
일부에선 순수한 지원 보다 ‘잿밥’에 더 관심
학연·지연·친분 대신 정책으로 후원결정을
한국에선 대선 주자들의 행보가 분주하고 미국에선 후원회의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특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원하는 것은 흠잡을 일이 아니다. 떡고물을 탐내 사람과 돈을 끌어 모으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해 11월께 한나라당의 한 부총재가 LA에서 온 방문객들을 맞았다. 이 부총재는 LA 손님들으로부터 "LA에 이회창 후보 후원회를 만들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들었다. 그는 "LA에는 이미 남가주 이회창 후원회가 있으니 또 다른 후원단체를 만드는 것은 자칫 후원회 분열로 비쳐질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내용은 부총재와 남가주 이회창 후원회 관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오간 얘기다.
기존에 후원회가 있는데 별도로 한국에 들어가 이회창 후보 측근과 만나 후원회 발족을 허용해 달라고 한 것은 순수하게 보기 어렵다.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일편단심이라면 후원회 ‘장’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백의종군하면서 단합된 힘을 발하는 길을 택했어야 했다. 후원회 요직을 다른 회원들이 차지하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해서 다른 후원회를 조직하려는 것은 동기가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이회창 후원회로는 이사 30여명, 회원이 300여명에 이르는 남가주 이회창 후원회(회장 조익현)와 오렌지카운티에 근거를 둔 새태평양재단(이사장 오구)이 있다. 남가주 이회창 후원회는 후발 단체인 새태평양재단과 협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관계자들간 대화채널을 열어놓고 있지만 단체 이름이 다르고 엄연히 다른 사람이 단체장을 맡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언제든 삐걱거릴 소지가 있다.
이들 두 단체가 동일인물을 지지하면서도 이름이 달라 모양새가 좋지 않음은 단체관계자도 인정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진정 ‘딴 생각’없이 시간과 돈을 써가며 희생을 하더라도 비슷한 후원단체들이 캠페인 과정에서 주도권이나 선거 후 공과를 놓고 티격태격한다면 "사심 없다"는 주장이 강변으로 들릴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면 지금이라고 대승적 차원에서 후원회를 통합하는 방안을 논의해 봄직하다.
한편 이회창 후보와 노선이 비슷한 미주한인포럼(회장 김시면)이 있다. 20여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미주한인포럼의 관계자는 "모금활동을 하는 후원회가 아니라 정책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이며 본국의 민주발전과 동포사회 권익향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며 이 후보와의 연계설을 부인하고 있다. 오는 3-4월께 한국 및 미주지역 교수들과 정치인들이 참석하는 학술 세미나를 열 예정인 포럼은 영문 뉴스도 발간해 정책홍보에도 관심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나라당 이신범 전 의원이 포럼의 명예회장으로 있고, 포럼 관계자가 밝혔듯이 동참의사를 밝힌 20여명의 이사들이 대부분 이회창 후보에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후보가 당선된 뒤 ‘모종의 선물’을 염두에 두고 활동을 전개할 것이란 추측이 억측만은 아니다. 향후 포럼의 정책연구 활동이 초당적 성격을 띠지 않는 한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당파성 의구심’은 쉽게 불식되지 않을 것이다.
후보가 여럿이고 후원회가 많아 경쟁이 붙으면 종종 ‘튀는 공약’이 나온다. 워싱턴DC에서는 기존후원회와 조직개편 추진세력간 불화가 표면화돼 말썽을 빚고 있다. 조직개편을 추진한 관계자가 이회창 후보의 말을 빌어, 이 후보가 동포들을 위한 회관건립을 약속했다며 은근히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 있고 기존 후원회측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얘기"라며 반박하고 있어 조용하던 커뮤니티가 시끄러워졌다. 겉보기엔 ‘정통성 시비’ 같지만 그 속에는 ‘자리다툼’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난 92년 제 14대 대선 때 박찬종씨의 LA후원회 관계자는 한 인기도 조사에서 박 후보가 ‘반짝 1위’를 올린 점을 언급하면서 "박 후보가 당선될 것이니 지금 도와주면 내가 책임지고 나중에 섭섭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기도 했다.
특정 후보에 대한 후원활동은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참여자들에게 모임의 성격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살수도 있다. LA 학계, 경제계 인사 등을 중심으로 지난해 8월께 민주당 차기 대선 후보를 위한 정책연구 모임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시 이인제씨가 민주당 후보로 유력시되긴 했지만 공식후보가 아니었고 참석자들이 모두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몇 차례 회동을 통해 은근히 이인제 후보지지 쪽으로 잠정적인 가닥이 잡혀가자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민주당에 정책자문으로 기여하고 싶어 처음 이 모임에 관심을 보였던 한 인사는 "개인적으로 진보적인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데 이인제 후보의 연구모임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 적극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있다"며 "좀 더 분명한 노선을 확인 한 뒤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부터 채비를 한 LA지역 이인제 후원회(회장 윤병욱)는 민주당내 이인제 후보와 반 이인제 그룹간 대립국면이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직시해 차제에 정책자문 모임의 성격규정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후원회를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지역 인사들의 이름을 본인의 허락 없이 회원명단에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시애틀에서 김덕룡 한나라당 부총재를 후원하기 위해 조만간 결성될 가칭 한민족 공동체는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의 이름을 임의대로 발기인 명단에 포함시켜 당사자들로부터 시정요구를 받기도 했다.
이회창 후원회는 LA뿐 아니라 뉴욕, 워싱턴DC 등 미주지역에 10여개가 진을 치고 있다. 김종필 자민련총재도 출마를 선언했으니 충청도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후원회(회장 김광남)의 움직임이 빨라질 것이다. 민주당의 김근태, 노무현, 정동영, 한화갑, 박상천 후원회들도 시동을 걸고 있다. 만일 이들 후원회가 지지 후보의 정책을 바탕으로 활동하지 않고 지연이나 학연 또는 개인적 친분 등으로 똘똘 뭉치면 커뮤니티 화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되레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
’철새’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빗대는 단어지만 LA에도 과감한 ‘자기변신’으로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지난 97년께 타운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LA한인 중 ‘핵심멤버’ 모임이 있었다. 10여명이 참석한 이 모임에 끼인 한 인사는 ‘DJ 찬가’를 부르듯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렬한 지지발언을 하는 등 공을 들여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된 뒤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평이 나 있다.
이 인사는 오랫동안 ‘작은 권력’을 누리다 마침내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반 DJ"로 급선회했다. 이회창 진영으로 넘어가진 않았지만 ‘반 DJ’ 활동을 펼 작정이라고 하니 이는 곧 ‘친 이회창’ 캠페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혹시 새 정권 아래서 또 다른 ‘감투’를 노리고 있다면 커뮤니티 전체에 먹칠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배우자와 이혼했다 해서 상대방을 욕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다르지 않다. DJ가 싫어졌다 해도 그의 덕을 보았다면 얼마간 조용히 지내는 게 인간의 도리인 것이다.
대선 캠페인이 올 한해 LA를 달굴 것이다. 개인적 관계에 집착하거나 한자리할 욕심으로 특정후보를 밀어준다면 자신과 후보는 물론, 한국과 한인사회에도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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