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에는
▶ 김현덕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새해라는 시간의 매듭은 새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우리에게 준다. 지난해에 지켜지지 못하였던 자신과의 약속을 돌이키며 "올해는 꼭 지켜야지" 하며 새로운 결심을 한다. 나도 정초에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새해에 하고 싶은 일과 꼭 해야 할 일들을 일기장 맨 앞장에 적어 놓는다. 기장을 열 때마다 나와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실천하자는 뜻에서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새해 결심 목록 중에 "간소하게 살자"라는 항목이 적혀 있다. 필요 없는 물건은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정초에 결심하였으면서도 정월이 지나기도 전에 그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세일이 있으면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서 사고, 새로 나온 전자제품은 신기해서 사고, 옷은 예뻐서 사 가지고 집에 들어온다.
올해는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하여 실천하여 보고 싶어서 1월 한달은 아무 것도 집에 가져 들어오지 않는 달로 정하였다. 심지어는 식품가게도 가지 않고, 한달 동안 집에 있는 음식물로 요리하고, 과일이나 채소가 먹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먹되 집안에 들여오지 말자고 가족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몇 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닐 때는 이삿짐 보따리 싸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다녔는데 이곳에 이사온 후로는 거의 10년 동안 한집에서 살게되어 필요 없는 물건들이 버려지는 대신에 이 방 저 방으로 옮겨지며 자리바꿈을 하며 쌓여졌다. 학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책과 잡동사니 살림살이들을 끌고 와서 다락방에 넣어놓고 갔다. 내가 보기에는 버려도 괜찮을 것 같은 물건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한 물건일지 몰라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 주고 있다보니 다락이 무너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월 초하루, 남들은 떡국 먹고 식구들끼리 모여 놀고 있을 때 우리 식구들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대청소를 시작하였다. 남편은 창고 짐을 정리하고, 아들은 다락방을 정리하고 나는 부엌을 담당하였다.
부엌을 정리하면서 "이 집 아줌마 되게 살림 못하네" 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똑같은 용구들이 몇 개씩 있고 종류들도 다양하여 가게를 열어도 될 것 같았다. 식구도 많지 않으면서 웬 그릇들은 이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텅텅 빈방에서 돗자리 하나 깔아 놓고 사는 르완다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엌 살림은커녕 부엌도 없어 마당 한가운데 돌 세 개 놓고 그 위에 솥을 걸어놓고 바나나를 삶아, 식구 숫자대로 밥그릇조차 없어 식구들이 한꺼번에 못 먹고 돌아가면서 식사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미국에서 사는 우리들은 너무도 낭비하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아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없애 버리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막상 버리려고 하니 "이것은 동생이 주었는데 저것은 어머님이 주셨는데" 하면서 하나 둘 찬장에 다시 집어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러다가는 "간소화하자"는 새해 결심이 말로 끝나 버릴 것 같아 마음을 갈아먹고 남편과 아들에게 자기들이 생각해서 꼭 부엌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만 남기고 다 없애 버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책들을 정리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책을 버리는 것은 마치 몸 한 부분을 잘라서 버리는 것 같은 이상한 버릇 때문에 전혀 쓸모 없는 헌책을 버리면서도 입술을 깨물고 버리는 버릇이 있다. 우선 컴퓨터 책들을 책장에서 솎아내었다. 다음으로 잡지책을 뽑아내고 한물 간 교과서들을 끄집어내서 쓰레기차로 실려갈 박스에 넣었다. 읽어 버린 소설들을 버릴까 하다가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다음해 새해 대청소 때에 버리기로 미루었다.
옷장 속을 정리하였다. 쓰지 않는 담요들, 아직도 신을 수 있는 신발들, 작아 입지 못하는 옷들을 솎아 내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한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을 골라내었다. 누군가 요긴하게 사용하기를 바라면서 구세군에 갖다 주었다.
새해 첫날부터 무슨 청소냐고 볼멘 소리를 하던 아들은 나중에는 휘파람까지 불어가면서 자기 물건을 정리하였다. 어렸을 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모은 야구 카드들을 인터넷 경매장에 내어다 판다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오랫동안 잃어버린 줄 알고 있었던 물건을 찾았다고 싱글벙글 하면서 열심히 치웠다.
정리한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직도 너무 많은 물건으로 가득한 집안을 둘러보면서 빈방에 앉은뱅이 책상 하나 있는 방이 그리워진다. 마음이 시끄러워 질 때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빈방 하나가 있었으면서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올해는 마음을 비우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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