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조광동 본보 시카고시사 편집국장
어느 해 인가, 크리스마스 전날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밤늦게 포장하던 나는 난감해 졌다. 넉넉지가 않았던 그때, 나는 아이들 선물은 마련했는데 아내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카드를 썼다. "새해에는 좋은 남편이 되도록 노력하고, 설거지를 많이 하도록 하겠습니다"하는 내용이었다.
몇 번 흉내를 내다가 설거지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새해만 되면 나는 공수표를 낸 설거지 생각이 나서 멋쩍기도 하고 자책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정말 설거지를 할 생각이 있어서 그런 약속을 했을까, 아니면 위기를 모면하려고 다소 우스꽝스런 선물 약속을 한 것일까.
아내로부터 남성중심주의가 남다르게 강하다는 핀잔을 듣는 나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멀리 있는 남의 일이었다. 남자가 할 일이 많은데 부엌에 들어가 허비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내 합리화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이들과 집을 비울 때면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여러 번 했다. 그릇을 닦으면서 설거지를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거지가 정신건강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기 명분을 발견했다. 그릇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닦아 내면서 나는 내 마음의 노폐물을 씻어내는 것 같은 유쾌한 가벼움도 느꼈다.
설거지를 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안하던 행동을 갑자기 할 만큼 마음이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급한 김에 새해 선물의 명분으로 설거지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 왜 설거지 약속을 못지켰을까를 생각해 보면, 설거지를 하는 기본 생각과 자세가 잘못된 것 같았다. 설거지가 스트레스를 푸는데 괜찮은 것 같다는 내 생각은 다분히 이기적이었다. 설거지 선물을 하려면 아내를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마음 가짐이 부족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전날 선물을 마련 못한 진심어린 미안함과 고생하는 아내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해주는 징표로서 설거지 약속을 했다면 설거지 약속은 지켜질 확률이 컸을 것이다.
새해는 자기 습관의 한 부분을 교정하는 디딤돌이다. 평소에 고치려면 힘들지만 새해라는 이름을 빌리면 자기 결함을 극복할 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계기를 만들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습관의 틀을 고치거나 일상의 반복에서 뛰쳐 나오는 변신을 하려면 그것을 지탱해주는 마음 바닥을 새롭게 쓸어야 할 것 같다.
마음의 틀을 바꾸지 않고는 묵은 습관을 교정하기가 어렵다. 설거지 약속을 지키려면 아내를 위하고 사랑을 표시하는 마음의 틀을 다시 짜야 할 것이다. 건강이 중요한 것을 아는 것 만으로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할 의지력을 만들어 내기 힘들고,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는 밤을 새면서 맡은 일을 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새벽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은 건강과 책임을 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틀에서 출발한다. 마음의 틀은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낼수가 있다.
새해는 마음의 틀을 바꾸게 하는 등불이 될 수 있다. 마음은 희망을 만들어 내고 삶의 전환을 만들어 낸다. 마음먹기에 따라 반병 물병은 반이나 남았을수도 있고, 반 밖에 남지 않았을수도 있다.
새해는 마음먹는 계기를 마련하는 시발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모습과 능력을 바꿀수가 없다. 그러나 모습과 능력을 다듬느냐, 아니면 팽개쳐 버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과 능력을 엄청나게 다르게 할 수가 있다. 새해는 그것을 바꾸게 해주는 출발점이다. 시련과 고난도 마음먹기에 따라 감사와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새해에 새 마음의 틀을 짤 수가 있다.
수없이 실패로 돌아가는 새해결심을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그 반복의 틀을 잘라 버리려는 결심을 계속하고 있다. 새해가 된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새해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마음을 뒤척이고 있다. 부도수표가 된 설거지 약속을 실천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멈칫 "그럴 시간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는걸 보면 아직도 뜸이 덜든 모양이다.
습관을 고치는 사람은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마음의 틀을 바꿀 때 새해결심을 실천할 수 있고, 새해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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