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나이가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면 유난히 과거를 들먹이는 일이 많아진다.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에는 지난 날 젊은 시절의 일들이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같은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과거의 추억담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하면 할수록 그만큼 늙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청년들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앞날의 일들을 생각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어떤 학교를 가서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겠다든지 또는 돈을 열심히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든지, 아무튼 앞으로 닥아올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와도 미래의 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애인들 사이에는 미래의 행복에 대한 약속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 젊은날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의 추억이 좋은 것은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들에게 아름답게 닥아오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청춘시절을 회상하면 아름답지 않은 청춘이 없다.
한때 말할 수 없이 심한 슬픔을 남겨준 실연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이 치유되고 나면 마음속 깊이 하나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겨진다.
젊은 시절 고생스러웠던 군대생활이나 혹독한 시집살이, 가난했던 생활을 후일에 되풀이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한 폭의 그림같은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과거도 있다. 이민 초창기에 미국에 온 한인들은 서로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모두들 무슨 사연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고 어떤 경로로 온 사람들인데 과거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와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 그 과거를 물어보았자 바로 대답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또 미국이라는 새 땅에 온 이상 그 과거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흔히 정권이 바뀌면 과거와의 단절을 내세우는데 그것은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전제 하에 이제부터는 잘 해 보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미래는 과거보다 더 아름답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무지개 꿈]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가 머리속에 그리는 미래를 상상해 보면 미래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라는 구름 위에서 대통령도 되고 재벌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도 이렇게 좋을 수만은 없다. 반면에 너무도 큰 불확실성이 있는 것이 미래이며 그래서 불안하기까지 한 것이 미래인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현재이다. 과거는 좋든 싫든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점이며 과거가 현재의 밑바탕이 되긴 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더 이상 현재를 움직일 힘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시점이지만 현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은 공허할 뿐이다.
말하자면 현재야 말로 과거를 해석하고 과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를 구상하고 미래의 모습을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진 유일한 시점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시간은 현재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 계측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파악하는 시간지각에 따를 때 사람마다 그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 있고 빠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역동적 운동상태이다.
그러므로 운동의 법칙 중 하나인 가속력의 법칙이 작용하여 세월을 많이 보낸 사람일수록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끼는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금년 한 해가 참으로 빨리 가 버렸다. 이제 2001년은 가버리고 2002년이 닥아오고 있다.
지난 해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고 새해가 미래로 닥아오고 있다면 이 송년의 시점은 무엇일까. 바로 과거와 미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현재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본 후 고이 접어 추억의 사진첩에 한 장의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겨두고 미래의 새 모습을 그리는 의미있는 송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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