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신자의 죄와 벌을 면해주는 대가로 기부를 받고 교황의 이름으로 발급한 증서였다. 애당초 면죄부는 죄를 참회해도 벌은 남게 되므로 기도나 선행으로 벌을 갚아야 한다는 교리에 의거해 발행돼 십자군에 동참하거나, 단식 및 자선 캠페인에 함께 하는 신자들에게 부여됐었다. 물론 돈을 받고 파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당 건축과 선교사업에 재원이 필요하자 헌금을 권유하면서 면죄부 발행이 남용되는 폐단을 가져왔다. 16세기 초 교황 레오 10세는 현재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 개축을 위한 자금조달의 일환으로 면죄부를 발행했다.
레오 10세는 독일 마인츠의 감독 알브레 히트에게 독일 영내 면죄부 판매권을 일임했고 히트는 노련한 수도사 요한 테첼에게 이 일을 맡겼다. 1517년 테첼 일행이 작센 지방에서 면죄부를 팔자 이를 목도한 수도사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도전하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공표했다.
루터의 외침은 독일 민중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교황 칙사와의 토론에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데 이어 교황이 내린 파문장을 민중이 보는 앞에서 불사르면서 종교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1545년부터 개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면죄부의 남발을 규제하기 시작해 점차 면죄부가 사라졌지만, 돈과 바꾼 종이 한 장이 벌을 면하게 한다는 믿음은 두고두고 조소의 대상이 돼왔다.
대다수 미국인이 면죄부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종교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합당한 절차가 무시된 소위 ‘급행료’나 ‘한건주의’를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정서 때문이다. 더욱이 죄와 벌처럼 중요한 사안을 단박에 해결하려는 것은 올바른 삶의 자세가 아니란 판단에서다.
미국의 저력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요구하는 조건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충족시켜 가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데 있다. 마켓 계산대 앞에 길게 줄지어 서 있으면서도 여유 만만해 하는 사람들이 미국인들이다. 급하다고 다른 사람을 제치지 않는다.
출근길에 이유 모를 정전으로 사거리의 신호등이 작동을 하지 않으면 지각하지 않으려는 조급한 운전자들로 교통이 엉망이 되고 사고도 많이 날 법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제 갈 길을 간다. 그러니 소통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 상식을 벗어나 급히 서두르면 모두에게 마이너스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잘 알고 있으므로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대학지원, 여권 및 영주권, 시민권 신청 등에서도 서둘러 되는 일이 없다. 모두 정해진 룰에 따라 절차를 밟아야 소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종종 비효율적이란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미국의 힘은 이같이 절차를 중시 여기고 지키려는 데서 솟는다.
존 애시크로프트 미 법무장관이 지난주 테러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외국인들의 미국비자 발급과 시민권 취득을 지원하기 위해 ‘책임 있는 협조자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테러리스트와 그들의 활동, 소재지 등에 대해 유용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외국인들에게 그 보상으로 미국 입국 및 생활을 돕는다는 내용이다.
테러 정보를 당국에 제공해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 불법체류자라도 3년간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 또 미국에 오고 싶어하는 외국인이 현지 주재 미대사관에 유용한 테러정보를 들고 가면 미국입국을 수월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들에게 적용되는 특별비자가 향후 3년내 만료되지만 정부차원에서 이들의 시민권 취득 길을 평탄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합법신분으로 살거나 시민권을 받으려면 끈기 있게 하나하나 절차를 밟아야 한다. 불법체류자들에게 ‘면죄부’를, 시민권을 따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에게 ‘급행티켓’을 흔들어대며 테러정보를 구하려는 것은 합당한 절차를 무시한 처사다.
합법체류 신분을 얻지 못해 불안해하는, 보고픈 가족들과 만날 날을 기다리는 많은 한인들이 실낱 희망을 걸고 오랫동안 매달려온 ‘영주권 취득허용’ 245(i) 조항의 추가연장은 무산되도록 방치하고, 테러정보로 "한 건 하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이 요즘 미 정부의 모습이다. 아무리 테러에 혼났다 해도 정말 미국답지 않은 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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