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가장 쓸쓸한 달이란 느낌이다. 가을이 가져다주는 황금빛의 풍요로움도 11월에선 찾을 수 없다. 온통 잿빛 투성이로 조락(凋落)의 계절이 11월이다.
"하늘엔 구름이 무겁게 내리덮어 모든 것이 착 가라앉은 어둡고 적막한 어느 가을날…" 에드가 앨런 포우의 ‘어셔가의 몰락’은 이런 서두로 그 음울한 스토리를 펼쳐나간다. ‘적막한 어느 가을날’은 아마도 11월의 어느 날일지도 모른다.
11월은 망향의 달로도 느껴진다. "나그네 몸으로 홀로 이향(異鄕)에 있어 가절(佳節) 때마다 가족 생각이 더 간절하다…"(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성당(盛唐)의 시인 왕유의 칠언절구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도 계절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11월은 그러나 감사절이 있게 되면서 그 의미가 달라졌다. 더 이상 멜랑콜리의 계절이 아닌 것이다. 오랫동안 못 보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다.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는다. 웃음꽃이 핀다.
온통 잿빛 투성이, 우수의 단조로운 색조가 홀연히 바뀐다. 뭐랄까. 잘 구운 터키와도 같이 윤이 나는 아늑한 갈색이다. 거기에 빨강, 초록 등 색깔이 겹쳐지면서 훈기도 감돈다. 음울한 계절이 기쁨의 계절로 바뀐 것이다. 감사가 빚어낸 기적이다.
또 다시 감사절이다. ‘또 다시’란 말이 붙은 건 테러로, 전쟁으로, 탄저균 공포로, 불황으로, 지난 두달여의 세월이 유난히 길게 느껴져서다.
’이제 미국은 결코 같은 미국이 아니다’-. ‘2001년 9월11일’을 기점으로 달라진 미국을 타임지는 커버 스토리로 다루었다.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졌으므로 미국인들이 맞는 올해의 감사절은 과거의 감사절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됐다는 것이다.
"9월11일 그 날. 수천명의 고귀한 목숨이 사라졌지만 그 참사는 동시에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삶의 진정한 이유.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가족. 관계 속에서 나의 모습. 라이프 스타일. 이런 것들을 테러참사의 와중에서 미국인들은 새삼 되돌아 보게됐다." 이와 함께 치유와 화해의 물결이 일기 시작해 관계 속에서 멀어지고 방황하던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됐다는 게 그 스토리의 요약이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이 준 상처로 가까이 살면서도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아버지를 테러참사 후 찾아가게 됐다." 한 여인의 고백이다. 이 에피소드를 치유와 화해의 한 예로 들면서 타임지는 미국 사회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큰 물결을 전하고 있다.
그 변화는 사고 패러다임의 전환으로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경찰관, 소방관 등 그 존재의 필요성은 인정됐지만 별다른 가치부여를 받지 못했던 직업인에 대한 인식에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시민을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은 이들은 이제 아메리카의 영웅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연장에서 미국을 상징하는 것들, 성조기, 애국심 더 나아가 정부 등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미국을 지탱해 왔고, 현재도 지탱하고 있는 가치관들에 대한 재발견이 감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과 질서, 관용의 정신 등 어찌 보면 당연시되어온 전통적 미국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대한 감사의 봇물이 새삼 넘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감사절의 본래 의미는 풍성한 수확에 있는 게 아니다. 생존에 그 의미가 있다. 절박한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남게 된 데 대한 감사와 또한 그 섭리를 되새김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각 문화마다 한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명절이 있다. 미국의 감사절은 그게 아니다. 1621년 청교도 필그림들이 지낸 감사도 풍요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첫 해 겨울 함께 온 믿음의 형제자매중 거의 절반이 죽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첫 소출로 감사를 드린 것이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풍성한 소출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오랜 내전의 와중에 과부가 된 여인, 고아가 된 어린이들의 고통을 돌보자는 의미에서 감사절을 선포한 것이다. 미국의 감사절은 그러므로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어려움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이 감사절의 정신인 것이다.
"터키가 마침내 다 구워졌다. 성대한 식탁이 차려졌다.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감사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먼저 감사해야 할까."
11월은 감사절이 있어 결코 쓸쓸하지 않은 달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