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끝났다. 월드시리즈2001 승부열전 7부작은 짜고 해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은 명장면을 연출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막의 도시 피닉스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챔피언 축제도 끝물이다.
동양인 최초로 WS마운드에 오른 스물두살 한국청년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그는 과연 어떻게 되는가. 거뜬히 재기할 수 있을까. 메이저리리그 진출 3년만에 챔피언 링을 꿰찬 그를 놓고 이처럼 김새는 물음이 제기되는 까닭은 자명하다. 양키스테디엄에서 당한 악몽 때문이다.
금의환향·돈방석·인기절정·대박 등 꿈보다 해몽이 좋은 한국언론의 김병현 관련기사와는 영 딴판으로 그에 대한 ML안팎 진단은 사뭇 잔인하다. 심한 경우 그가 제대로 커리어를 연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까지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다. 따라서 이제 안으로 굽은 팔을 똑바로 펴서 김병현의 내일에 대해 보다 냉정하게 재보며 아픈 만큼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밝은 요소
"이번에 졌으면 은퇴할 생각까지 했다"는 김병현의 실토에서 보듯 D백스 우승은 그에게 복음 그 자체였다. WS 향방과는 별개로 그가 팀내 분위기가 좋은 D백스 소속이란 점도 천만다행이다. 4, 5차전을 망치고 벼랑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D백스의 누구 하나 김병현을 탓하기는커녕 앞다퉈 두둔하며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특히 데뷔이래 처음으로 3일밖에 못쉬고 마운드에 올라 승리를 굳혀놨다 날려버린 커트 쉴링은 "(6, 7차전에서 상황이 됐는데) BK가 꽁무니를 빼면 내가 등을 떠밀어서라도 또 던지게 하겠다"고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들이 고지점령을 앞둔 상황에서 적전분열의 틈새를 주지 않으려는 속뜻도 다분하다. 그러나 LA 다저스 등 많은 팀들이 걸핏하면 잘잘못을 따지며 내분에 휩싸였던 데 비해 D백스는 재정난때문에 랜디 잔슨·커트 쉴링 등의 연봉을 외상으로 미뤄둔 채 꾸려왔음에도 올해 내내 이렇다할 잡음 한번 내지 않았다.
김병현의 낙천적 성격과 창창한 나이 또한 재기가능성을 밝게 해주는 대목이다. 또 양키스테디엄에서의 악몽이 사이드암에 가까운 언더핸드(혹은 언더핸드에 가까운 사이드암) 피칭모션만으로도 한수 잡고 들어가는 그의 본래 장점과 비정통파 투수로는 드물게 빠르면서도(최고시속 93-94마일) 다양한 무기(와이드 브레이킹 슬라이더·업슛·싱커) 자체를 앗아간 것은 아니다. 불과 서너달전 그는 양키스테디엄에서 던졌던 바로 그 공으로 타자들을 속속 농락하며 거의 한달동안 방어율 0.00을 기록했었다.
▶어두운 요소
김병현이 맞은 WS 홈런 3방은 욱일승천하던 그의 자신감에 흠집을 낸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본인의 새출발 다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나마 쉽지 않은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끝내주는 능력’이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다는 점이다. ML전문가들은 한결같이 2연패를 위한 D백스의 과제1호로 믿을만한 구원투수 확보를 꼽고 있다. 김병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D백스 캠프도 부상중인 매트 맨타이가 회복하면 그를 땜빵 마무리 겸 셋업맨으로 ‘원대복귀’시키리란 전망이다.
김병현에 보인 밥 브렌리 감독의 신뢰 역시 식을 수밖에 없다. 4차전 실패뒤부터 부쩍 늘어난 브렌리의 BK신임 발언들은 사실 엉뚱한 용병술을 질타하는 여론에 대한 맞불성격이 강했다. 7차전 기용을 시사하고 불펜에서 몸을 풀게 한 것도 십중팔구 시위용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예측불허의 인물 브렌리와 관련해 가장 예측가능한 것은 중대고비에 더 이상 ‘BK갬블’을 시도하지 않으리란 점"이라는 야구계 얘기는 김병현의 쓰임새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다 팀동료·선배들의 시선이 늘 고우리란 보장은 없다. 새삼 4, 5차전 실패를 탓한다는 뜻이 아니다. 김병현이 늑장을 부려 팀미팅이나 선수단이동에 지장을 줘도 지금까지는 ‘잠 많은 막내의 귀여운 소동’으로 눈감아줬지만 이제 가차없이 심판대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3차전에서 역투한 브라이언 앤더슨은 언젠가 스포츠토크쇼에서 김병현의 늑장일화를 열거하며 나름대로 "뭘 몰라서 그런지 어려서 그런지…"라고 덧붙인 적이 있다.
D백스의 백전노장 포수 데이미언 밀러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NLCS때 김병현이 주문대로 공을 던지려 하지 않아 자신이 마운드에 쫓아나가 의견을 조율해야 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앤더슨이나 밀러 둘다 트집잡기가 아니라 김병현의 독특한 면을 강조하기 위해 꺼낸 말이긴 하지만 그의 ‘내무생활’이 마냥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김병현의 처신 또는 마음가짐에 따라 극복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상대팀 타자들이 김병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생소한 피칭모션이 한결 친숙해졌고 구질과 코스·구속 등 BK의 거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WS 홈런’에 맛들인 타자들은 내년 시즌 내내 김병현과의 승부에서 전에없이 적극성을 보일 건 뻔하다. 특히 시즌초반 타자들의 BK공략은 거의 표적공격에 가까울 것이다. 김병현으로선 그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하면 거듭나겠지만 말려들면 선수생명 자체가 끝장날 수도 있다. 올 겨울을 잘 넘겨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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