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이십여년을 이곳에 사시다가 연세가 높아 조국땅에 묻히신다며 영주 귀국하셨다. 한국에 가서 한국국적을 회복하는 절차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고 들었으므로 일단 미국여권을 가지고 귀국하셨는데 법무부에 가서 그 절차와 준비해야 할 구비서류를 알아보고는 당장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구비서류 중에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귀화증서 원본”과 여자인 경우에는 외국국적을 취득한 이후 “결혼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장모님은 미국으로 귀화하신 지가 이십년이 된 분이라 그 오랫동안 귀화증서 원본을 어디다 보관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의 관행처럼 미국 국적자라고 증명할 수 있는 미국 여권이면 대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시 법무부에 문의하였으나 법이 “귀화증서 원본”이라 했으므로 법대로 그 원본이 아니면 어떤 다른 종류의 서류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전혀 융통성이 없는 고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곳 이민국에 그 귀화증서의 재발급을 신청하였는데 이곳 이민국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원래 가지고 있던 영주권의 번호를 모르고는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고 본인 또한 이십여년 전의 영주권 기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영주권 번호를 찾느라고 이민국과 무려 이년 가까이 수색을 벌인 끝에 장모님이 스폰서를 해서 초청한 처남의 파일을 통하여 그 번호를 찾게 되었고 이년 동안이나 법석을 떤 우리 고충을 동정하는 이민국 직원이 그야말로 급행으로 귀화증서를 재발급하기 전에 귀화했음을 증명한다는 국적취득 증명서류를 발급해 주었다.
부리나케 법무부로 뛰어갔다. 이러느라고 미국여권으로 이년여를 한국에 체류했으므로 불법체류 외국인 신분이 되어 이미 수십만원의 벌금을 물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이 고생끝에 겨우 만들어 온 미국 이민국의 증명을 법무부 담당자는 역시 법이 말하는 “귀화증서 원본”이 아니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꼭 같은 고집이었다.
이런 난리를 치르느라고 그동안 다른 서류에 관해서는 미처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그제서야 다른 서류를 검토해 보았다. 역시 문제가 있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실제로 만들려고 하니 어디에서 이런 증명을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결혼 이혼 등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기록되는 호적등본 한통이면 간단히 해결되는 서류이지만 호적등본 제도가 없는 미국에서는 결혼을 했다는 증명은 뗄 수 있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증명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사관에 문의하고 변호사에게도 문의해 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묻는 쪽이 웃음거리만 되었다.
다시 법무부에 문의했다. 미국의 어느 기관이 이런 증명을 발급하는지 물었으나 미국 정부의 일을 왜 한국 공무원인 자기에게 묻느냐고 핀잔만 줄 뿐이었다. 미국의 어느 기관이 이런 증명을 만드는지는 자기가 알 바 없고 법이 그런 증명을 첨부하라고 했으므로 무슨 재주를 부리든지 이걸 해와야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런 서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 증명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소 귀에 경읽기였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런 서류를 만들어 와서 쉽게 수속을 끝마쳤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서류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했는지 수수께끼였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부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제출한 “결혼하지 않았다는 증명”의 사본을 부탁했다. 그래야 나도 어디에 가서 어떤 것을 만드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부탁 역시 남의 서류를 함부로 사본할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직원이 동정어린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무척 순진하십니다.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이 앞에 즐비해 있는 사법서사 사무실에 일을 맡기면 편안히 처리할 수 있는 쉬운 일을 가지고...”
머리를 스치는 감이 있었다. 법무부 앞에 자리한 한 사법서사 사무실에 가슴 쓰릴 만큼 수수료를 지불하고 일을 맡겼다. 끝내 “그 결혼하지 않았다는 증명”은 어디서 솟아나서 제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법서사의 조화로 장모님은 무려 삼년여의 수속끝에 지금 다시 어려운 한국인이 되시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법규정과 또 그런 법규정의 융통성을 전혀 거부하는 담당공무원 그리고 이런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편법으로 일을 처리해내는 사법서사. 짜고 치는 고스톱판 이야기가 아닙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