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 보다 높은 설산...’어서오라’ 손짓하네
대나무가 매듭을 맺듯, 삶에 있어 매듭을 짓는 기회를 갖는 자는 복되다. ‘나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삶의 근원에 관한 답을 구하기에 산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 산에 오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곳에 서게 되면 깨달아진다. 정상을 향하여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자체로 족한 것임을. 그리고 우리들 삶 역시, 죽음을 향해 나가는 순간 순간의 집합체임을.
그저 산이 좋은 사람들의 모임, 재미 한인산악회(회장 김명준)의 일원으로 히말라야 원정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염려 어린 눈빛을 뒤로하고 길을 나설 때는 이미 아무런 보장 없는 목숨에 대한 마음 준비를 다진 후였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히말라야 등반이야말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네팔 왕국, 쿰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군, 임자체 등반을 위해 원정대는 1년 전부터 볼디 산, 휘트니 산을 오가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 그리고 지난 9월21일, 드디어 출사표를 던지고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9월25일. 홍콩에서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의 비행기, 로얄 네팔 항공에 올라타고 보니 LA에서부터 홍콩까지의 길을 이어준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와 서비스가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아 진다. 이마 한가운데 빨간색 티카를 찍고 셰르파 마냥 색동 앞치마를 두른 승무원들은 비위에 맞지 않는 기내식 등 모든 옹색함이 용서될 만한 친절함으로 승객들을 대한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국제 공항을 밟은 원정대를 선발대는 목에 화환을 걸어주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얼굴 가무잡잡한 네팔 사람들과 셰르파족들이 인간 시장에 나선 날품팔이들처럼 팔려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 참 다르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를 만난다. 늦은 시각이지만 식당, 개스등 밝힌 선술집이 북적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임현담, 이근후, 조석필…. 그들은 도대체 전생에 무슨 공덕을 그리 쌓았기에 매년 히말라야를 찾으며 살 수 있는 걸까. 카트만두에 새 둥지를 틀고서 언제든 설산을 향해 떠날 수 있는 김홍성 시인 역시 히말라야에 의해 선택받은 복된 사람. 그와 그의 아내, 수자타 보살이 함께 살고 있는 보금자리에는 히말라야를 찾은 이들이 자주 들러 ‘백운산사’라는 어여쁜 이름이 붙여졌다. 뜰에서 벌어진 원정대 환영 행사에서 네팔 전통 음식과 함께 향유한 민속 음악은 우리 민요처럼 정겨운 구석이 있다. 네팔 사람이면 누구나 부를 줄 아는 ‘렛섬 피리리’의 흥겨우면서도 구슬픈 선율은 LA에 선 지금까지도 귓가에 들려온다.
다음날 아침, LA, 서울, 홍콩, 카트만두에 이어 4번째 비행기를 갈아타고 루크라로 들어갔다. 히말라야. 대체 어떤 보물을 품고 있기에 이다지 가는 길이 복잡하고 힘들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하늘 저 멀리 구름을 이고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은 눈의 거처라는 의미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한 해 전만 하더라도 자갈밭이었다는 히말라야의 관문, 루크라 공항. 이제는 매끄럽게 포장돼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해발 2,800미터의 루크라에 도착해 점심 식사를 했다. 카트만두에서 고용한 주방 요원 5명은 닭을 잡아 우리네 닭도리탕과 비슷한 요리를 내놓는다. 닭들도 주인들을 닮아 많이 걸어다녀서일까. 군살이 거의 없고 근육만 단단한 닭고기는 참 질기다. 하지만 맛은 기막혔다. 점심을 마친 후, 드디어 카라반이 시작됐다. 현창수 단장 외 11명의 대원, 주방 요원과 포터들, 가이드인 앙 텐바 셰르파, 등반 셰르파에 짐을 실은 야크 12마리까지 흡사 실크 로드를 횡단하는 상인들만큼 긴 행렬이 이어진다.
한국의 원정대와 등반을 마친 셰르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가 무엇일까. 당신의 짐작 그대로, "빨리 빨리"이다. 한국 사람들이 네팔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역시, 빨리라는 의미의 "치또, 치또"이다. 세상사 저 멀리 두고 온 사람들이 뭐가 그리 급해 치또, 치또를 외치는 건지. 시간도 느릿느릿 흐르는 히말라야, 이참에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체험해 보련다. 천천히, 느리게, 비스따리, 비스따리. 오늘의 카라반은 찻집마다 들러 야크 우유 넣은 차를 마셔가며 무진장 비스따리로 한다. 히말라야에서의 첫 밤을 박팅의 소박한 라지에서 맞는다.
이튿날은 남체 바자르까지 전진을 했다. 산동네에도 이렇게 큰 마을이 있다니. 토요일이면 커다란 장도 열리는 이곳은 호텔, 라지도 많고 제법 그럴싸한 빵집도 있으며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는 사이버 카페까지 들어서 있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이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싼값에 임대하거나 구입하기도 하는 곳이다.
9월28일. 풍키탱카에 있는 앙 도마 셰르파니의 찻집, 소노사 라지에 들러 차를 한 잔 나누었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맨 뻐드렁니의 그녀의 모습은 시골길에서 마주쳤던 삶은 옥수수 파는 한국의 아주머니와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그녀의 집에는 1977년, 한국일보에서 단독 후원을 했던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포스터가 떡 하니 붙어있다.
고상돈이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던 그 때, 1차 선발대였던 박상렬씨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죽음의 비박을 하다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환상방황에 빠지는데 이 때 함께 동행했던 앙 푸르바 셰르파의 보살핌으로 동사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일보에 실렸던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었었다. 앙 푸르바 셰르파는 지금 등반 때문에 집에 없었지만 남편과 인연이 많은 한국 원정대를 맞은 그의 아내는 굳이 찻값을 받지 않겠다고 손을 내젓는다.
그 날 밤, 원정대는 탕보체에 입성했다. 이 산중에 이렇게 커다란 곰파(사원)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빡빡 머리 동승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된다. 새벽 5시30분.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눈을 비비며 아침 예불에 참여했다. 이번 원정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드리며 고결한 눈매의 세존 앞에 삼배를 올린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신들의 거처라는 뜻. 그 신들은 인간의 접근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것일까. 알피니즘이 태동하던 시점부터 히말라야는 수많은 산악인들의 목숨을 산 제물로 가져갔다. 우리가 등반하던 기간에도 비운은 들려왔다. 대한산악연맹 소속 푸모리 원정대 가운데 한 대원이 실종돼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투크라라는 동네에는 전설적인 산악인, 스캇 피셔를 비롯, 수많은 산악인들을 기리는 묘비명들이 장승처럼 둘러서 있다. 1992년 푸모리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후배 산악인 서성수(당시 34세)씨를 먼저 보내고 욕된 목숨 부지하며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신영철 대원은 담배에 불을 붙여 그의 위령탑에 물려준다. 그의 눈시울이 젖어든다.
고소증세. 세상에 이처럼 많은 증상을 갖고 있는 병 아닌 병은 처음이다. 머리가 아프고 설사가 나는가 하면 손발이 저리고 가슴이 팔딱거리며 얼굴이 통통 붓는다. 추쿵을 지나 임자체 베이스캠프에 다다르자 심각한 고소증세를 호소하는 대원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셰르파들은 라마제를 지내기 전에는 등반에 나서질 않는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달이 휘영청 밝은 밤, 원정대는 태극기와 성조기, 재미산악회기, 한국일보 기를 걸어 놓고 라마제 겸 산제, 그리고 차례를 함께 지냈다.
그 날 새벽 0시, 1차 선발대로 해발 6,180미터 임자체에 오른 김명준 회장을 비롯한 4명의 대원들은 9시간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온통 하얀 설산 곳곳에는 빙하가 갈라진 크레바스가 무섭도록 입을 벌리고 있었다고 한다. 베이스캠프에서 선발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은 지직거리는 워키토키를 통해 들려오는 정상 등정 소식에 선발대만큼 감격에 겨워했다. 4명의 산 사나이들이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것은 오후 3시께, 길 떠났던 독립군 남편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감격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세심한 먹거리를 준비한 식량 대원들, 이번 원정의 처음과 끝을 기획한 모든 이들, 따뜻한 차를 끓여주었던 셰르파들, 그리고 수목 한계선을 넘어서까지 그토록 아름다운 빛깔을 보여주었던 제비꽃과 에델바이스의 환한 미소가 없었던들 어찌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
내후년쯤, 에베레스트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등정팀은 임자체 정상 등정 후에 해발 5,200미터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시찰했다. 가끔씩 빙하가 움직이는 소리가 섬뜩한 지상 최고봉,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향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산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험한 산 역시 본 적이 없다. 하얀 설산, 하늘 아래 첫 동네, 히말라야. 야크의 배설물이 비 온 뒤 칙칙한 길거리에 섞여 있는 것을 보며 하루 빨리 하산하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 열흘만의 샤워를 끝내자마자 다시 그 산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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