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계에선 두 중견 감독의 변화가눈길을 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단지 변했다는 사실 만으로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창호(48) 장현수(42) 등 두 감독의 최근 변화는 오랜 좌절의 터널을 빠져 나와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목소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배창호와 장현수는 1980∼90년대 한국 영화계에 굵은 획을 그었던 감독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란히 90년대 후반부터 부진의 늪에 빠졌다. 그대로 잊혀지는 듯했다. 그들이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모색을 했다. 그 때마다 관객은 외면했고, 아픔은 컸다. 오랜 통증 끝에 그들은 마침내 생소한 도전에 몸을 던져 다시 관객 앞에 섰다. 작가주의에 몰입했던 배창호 감독은 상업성 짙은 영화로 선회했고, 상업성을 위해 신파에까지 집착했던 장현수감독은 거꾸로 작가주의에서 길을 찾았다.
배창호, 작가주의→블록버스터 감독으로
80년대 최고 흥행사였던 배창호 감독은 90년대 들어 상업 영화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자기 영화사를 차려 외부 자본에 기대지 않는 독립영화 시스템까지 도입했다. 그 결과물이 자신의 아내를 등장시켜 만든 ‘러브스토리’와 ‘정’ 등이었다.
하지만 두 작품은 관객에게 외면 받았다. 당시 그는 “하고싶은 작품을 마음껏 했지만 관객이 야속했다. 상업영화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 뒤에도 한동안 힘들었다”고 했다. ‘흑수선’을 구상한 게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흑수선’은 “차선변경 영화가 아닌 유턴 영화”라고 설명했다.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82년)부터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이상 84년) 등 한때 흥행을 주름 잡았던 영화를 만들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요즘의 거의 모든 젊은 감독들은 80년대 배창호의 영화를 보고 감독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배창호는 어느 시점부터 관객 코드를 외면한 채 ‘문예 영화’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거기서 뭔가 답을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관객을 먼저 외면했으니, 관객이 배창호를 외면한 것 또한 당연했다.
이제는 다르다. 스스로 고집했던 ‘숙성’의 시간을 지난 만큼 그가 만든 상업영화에는 뭔가 들어 있을 것이란 기대가 담겨 있다. 그래서 ‘흑수선’이 기다려진다.
장현수, 상업영화→작가주의 감독으로
장현수 감독은 한때 정우성 심은하 최민수 등 톱스타들과 작업했지만 3년 만의 컴백작 ‘라이방’에선 단 한 명의 스타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의 아내를 출연시키지 않는 배창호 감독과 대조적으로 장현수 감독은 자신의 아들(4)을 ‘투입’했다. 출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라이방’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4년. 제작비 조달이 어려운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데뷔 후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5억 원을 합해 모두 10억 원이 들었다. 100억원 짜리 영화가 등장할 요즘에 10억 원 짜리 영화를 4년에 걸쳐 만들다니…. 그가 얼마나 많은 마음 고생을 했을 지 짐작된다.
데뷔작 ‘걸어서 하늘까지’(92)로 주목받은 장현수 감독은 ‘게임의 법칙’으로 평단의 찬사와 더불어 흥행 감독 반열에 올랐다. ‘본투킬’ ‘남자의 향기’로 선 굵은 남성영화를 주로 선보였다. 어찌나 흥행에 ‘집착’했던지 그의 영화엔 신파 성향까지 짙게 담겨 있었다.
그게 스스로도 지겨웠던 모양이다. 그는 모든 걸 털어내고 작품성 짙은 영화에 매달렸다. 제작자들이 외면하자 혼자 힘으로 끙끙대며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라이방’이다.
’라이방’이 작가주의 계열의 작품이면서도 흥미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라이방’에 대해 “땀냄새나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유머러스하고 맛깔스런 대사, 현실에서 그대로옮겨온 듯한 상황 묘사는 ‘역시 장현수’라는 평을 듣는다.
배창호가 말하는 ‘흑수선’
분단이 갈라놓은 슬픈 사랑과 운명
반세기동안 엇갈린 슬픈 사랑과 운명을 다룬 영화다. 자칫 주제가 무거워 보이지만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영화는 아니다. 분단의로 다른 인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아픔을 그렸다.
영화는 현재와 1962년을 수시로 오간다. 연쇄살인 사건을 쫓는 오형사는 이 사건이 1952년 거제수용소 탈출 사건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알고 비밀을 파헤친다. 이 과정에 반세기 동안 만나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가 감춰져 있다.
장현수가 말하는 ‘라이방’
삶의 출구 찾는 세 명의 택시기사
밤 새워 술 마시고, 쓸데없이 농담하고, 가끔은 뒤엉켜 싸우기도 하는 세 명의 영업용 택시 기사 이야기다. 답답하고 막막한 세상사는 이야기를 유쾌하고 진솔하게 담으려했다. 동네의 부자 할머니 집을 털기로 한 날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달픈 인생, 서로가 서로의 그늘이 돼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 달 반 연극무대에 올려진 작품이며 그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해 연기가 안정적이다. ‘라이방’은 주인공 ‘학락’이 베트남 참전용사 삼촌에게 물려받은 선글라스 이름이며, ‘따가운 햇볕 같은 진실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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