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면 도와줄 수 있다’는 양면작전을 쓰고 있지만 탈레반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 초미의 관심사인 앞으로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또 그 결과는 어떨지 짚어본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주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오사마 빈 라덴은 물론 모든 테러리스트를 내놓고 모든 테러 훈련장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면서 “여기에는 어떤 협상의 여지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찌 보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빈 라덴 하나도 내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탈레반에게 이같은 최후통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임을 부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국민 6,000여명의 생명이 하루아침에 스러져 간 사상 초유의 비극을 겪은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다. 이런 점 등을 감안할 때 미 정책 입안자들은 탈레반 정도는 별 힘들이지 않고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계산을 이미 마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사실 현재 탈레반은 걸프전 때의 이라크 못지 않게 고립 무원의 상태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핵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가 모두 등을 돌렸을 뿐 아니라 유일하게 탈레반을 아프간의 합법 정부로 인정해 주던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연방도 단교를 선언했다. 오직 파키스탄만이 아직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만 파키스탄도 미국의 아프간 공격 시 협조를 약속한 상태다.
같은 회교국으로 미국과 사이가 나쁜 이란이 그나마 편들어줄 것 같지만 실은 전혀 딴판이다. 3년 전 탈레반이 10여명의 이란 외교관을 학살, 전쟁 일보 전까지 갔었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은 수니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탈레반과는 원래 원수지간이다.
외국은 그렇다 치고 국내 형편도 만만치 않다. 아프간 국민들의 탈레반의 학정에 이미 등을 돌린 지 오래고 탈레반의 세력 기반인 아프간 동남부 푸시툰족 내에서도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아프간 북쪽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북부 동맹은 최근 빈 라덴의 지령을 받은 테러범들에 의해 북부 동맹을 이끌어온 마수드 장군이 암살 당하자 복수의 이를 갈고 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수십만의 병력을 국경지대에 집결시킨 후 쳐들어가는 식으로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아프간은 20개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 최대 부족이 탈레반의 세력기반인 푸시툰으로 인구 2,500만중 3분의1을 차지한다. 이들 부족은 파키스탄에도 1,400만명이나 살고 있어 파키스탄으로서는 이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지 않을까가 늘 걱정이다. 파키스탄이 그동안 탈레반을 도운 것도 이를 무마하자는 속셈에서라는 것이다.
수천 개의 골짜기와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이들은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의식보다 한 부족의 구성원이란 의식이 훨씬 강하다. 이들은 보통 때는 서로 아옹다옹하지만 일단 침략군이 나타나면 일치 단결해 싸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안족부터 알렉산더 대왕, 아랍과 몽골, 투르크와 페르샤, 영국과 러시아 등 온갖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지만 그중 누구 하나도 이들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결국 물러갔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이던 1842년 1만5,000명의 대병력으로 아프간을 점령했던 영국은 아프간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고 정벌군이 전멸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중상을 입은 군의관 한 명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1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이 몰살당한 카이버 고개에는 그 때 죽은 영국군의 뼈가 굴러다닌다.
이와 비슷한 일이 그 후 130년이 지난 1979년 되풀이 됐다. 아프간을 우습게 보고 침공을 감행한 소련은 10년에 걸친 전쟁 기간에 1만5,000명의 희생자를 낸 후 1988년 꼬리를 내리고 후퇴했다. 이 때 입은 치욕이 소련 멸망의 한 원인이 됐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미국이 대군을 동원, 아프간을 장기 점령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할 경우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날지 알 수 없는 데다 자칫 침략군의 오명을 뒤집어 쓸 우려까지 있다. 뿐만 아니라 빈 라덴이 노리는 대로 전쟁의 성격이 기독교군대 회교군의 싸움으로 비화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등등을 고려할 때 미국이 어떤 전략을 선택할 지는 자명하다. 아프간 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반 탈레반 세력을 결집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이들에게 무한한 군사장비와 자금을 대주는 것이다. 부시는 25일 일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책은 아프간의 반탈레반 세력을 결집하는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이를 시인했다.
이미 워싱턴에 있는 북부 동맹 대표부에는 문턱이 닳도록 미 국방부 관계자들이 드나들고 있고 북부 동맹의 배후기지이자 지지세력인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에는 미 군사 고문단이 파견돼 있다. 아프간 국민의 민심을 탈레반으로부터 이반시키기 위해 ‘라디오 프리 아프간’ 방송을 내보내는 안도 추진중이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제공권 장악을 바탕으로 한 측면지원이나 특수부대 파견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반 탈레반 연합전선이 승리를 거둘 경우 미국은 별로 피를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프간 국민들을 압제에서 구해냈다는 명분까지 얻게 된다. 인권 탄압과 잔인함에 있어 탈레반에 뒤지지 않는 북부동맹이 과연 보다 나은 정부를 구성할 지는 미지수지만 탈레반과 빈 라덴을 몰아낸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된다.
고립무원의 탈레반이 전 세계 강대국이 힘을 합쳐 뛰어든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것은 세계 전사에 빛날 대사건이 될 것이다. 이번 아프간 전쟁은 걸프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보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일찍 끝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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