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센터는 미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펜타곤은 미국의 심장부다. 2001년 9월11일. 이 두 상징물이 화염속에 주저앉았다. 하늘로부터 테러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 날을 미 언론은 ‘21세기 진주만(Pearl Harbor)기습의 날’로 일제히 명명했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지는 "A Nation Awaits Casualty Counts"란 전단 제목하에 테러의 참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테러 피해자를 ‘victim’이란 용어 대신 전쟁용어로 보통 쓰이는 ‘casualty’로 표현했다. 이 같은 용어 사용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한 칼럼니스트는 ‘미국, 마침내 전쟁돌입’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 테러인가, 아니면 전쟁의 시작인가.
’미국은 근본에 있어 제국주의 세력이다’-. "동서냉전이 끝난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던져진 화두다. "미국은 과거에도, 또 현재도 제국주의 세력이다." ‘제국주의’의 정의에 대한 약간의 수정과 함께 워싱턴 내부에서 스스럼 없이 나오는 말이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세력이기는 한 데 일반적 의미의 제국주의 세력과는 구분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제국주의 세력 미국의 발아가 건국 초기인 제퍼슨 시대에 이미 시작됐다는 데에서 출발, 19세기에 영토적 제국주의를 거쳐 20세기 들어서는 이데올로기적 제국주의로 탈바꿈 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나님은 미국민을 선민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전 세계 개종의 사명을 부여했다."유명한 앨버트 베버릿지의 말이다. 이와 함께 나온 모토가 ‘계시된 천명’(Manifest of Destiny)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전체를 점유하고 개발하는 게 미국에 부여된 사명이라는 생각이다. 이 계시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와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장, 19세기말에는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했다.
우드로우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을 ‘민주화의 십자군 전쟁’으로 선포했다. 이후 미 제국주의의 주제는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변한다. 이데올로기적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2차대전참전의 논리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냉전시대에 민주화와 인권은 미정책의 ‘트레이드 마크’ 역할을 했다.
냉전종식후 미국은 또 다른 ‘계시된 천명’을 받은 분위기다. ‘인권과 민주화 확장’이 그 모토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남의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이 아니다. 우리가 전 세계에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다."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하원의장의 말이다.
이 제2의 ‘계시된 천명’은 다른 말로 하면 세계화다. 광의로 해석하면 유대·기독교전통에 뿌리를 둔 서구문명이 확대되는 과정이 바로 세계화인 셈이다. 이 세계화에 대해 일부에서는 미 제국주의세력 확장이라는 시각과 함께 심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미국적 스탠다드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므로 현대화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문명이 이슬람 문명이다. 미국 주도의 세게 경제질서에 무리없이 편입돼 있는 유교권과 달리 회교권은 서구 기독교 문화권과 특히 심한 갈등을 보여왔다. 그 갈등은 서구적 가치가 세계의 보편적 가치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나온 위기감으로 볼수 있다.
그 위기감은 때로 극단적 반발의 형태로 표출돼 왔다. 이슬람 민족주의에 호소하고 있는 테러리즘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대두와 함께 국제테러리즘이 반(反)미. 반(反)서방, 반(反)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또 무장투쟁의 성격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이야기를 돌리자. 뉴욕과 워싱턴을 동시에 덮친 이번 테러는 단순 반미테러인가, 아니면 전쟁의 서곡인가. 그 답의 단초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제시한 해결책(12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진주만을 기습한 세력을 철저히 응징, 붕괴시킨 것 같이 테러리즘을 조직적으로 분쇄해야 한다는 게 그 해결책이다.
윌리엄 코언 전 국방장관의 주장도 상당히 관심을 끈다. 미국이 ‘성전’(聖戰)을 선포할 차례가 됐다는 것이다. 그 성전은 증오에 바탕을 둔 게 아니라 자유, 관용, 법치 등 미국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자원과 방법을 총동원해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번 사태와 관련, 처음에는 ‘테러로 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테러’라는 말 대신 ‘전쟁 행위’로 본다고 말하고 이 ‘선과 악의 전쟁’에서 미국은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공연한 수사에 불과 할까. 새뮤얼 헌팅턴의 예언대로 ‘문명의 충돌’현상이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어쩐지 자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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