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유혹이 있을 때 정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
김종필 자민련 명예 총재가 이한동 국무총리의 거취와 관련해 지난 5일 한 말이다. 총리직에서 물러나란 얘기였다. 그러나 이 총리는 김 명예 총재의 지시성 권유를 무시했다. 자민련 총재직은 팽개친 채 현직 잔류를 선택했다. 김 명예 총재의 지시가 바람직한지 이 총리의 행태가 옳은지는 굳이 논하고 싶지 않다.
스페인의 현 총리는 올해 47세의 젊디젊은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다. 스페인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만큼 총리는 한국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아스나르는 우파인 국민당(PP)을 이끌고 2000년 3월 총선 에서 압승, 단독 정권을 수립했다. 스페인에서 우익 정당이 단독 집권한 것은 군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사후 25년만에 처음이다.
물론 아스나르의 정권 창출은 두 번째다. 96년 총선 을 통해 첫 집권했다. 그러나 당시는 과반수 득표에 실패, 부득이 연정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82년 이후 14년간 집권해왔던 사회노동당(PSOE)의 펠리페 곤잘레스 총리를 패퇴시킨 사실에만 만족해야 했다.
약관의 나이에 두 번씩이나 대권에 오른 만큼 그의 정치 행로는 일견 순탄했던 것처럼 보이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 90년 국민당 대표로 총선 에 처음 도전했다 실패, 펠리페 곤잘레스 총리에게 3번째 연임을 허용했다. 당시 그를 못 견디게 괴롭힌 것은 총선 패배보다 곤잘레스 총리와의 인간적인 비교였다.
작은 체구에 어눌한 말솜씨가 첫 번째 조롱거리였다. 얼핏 히틀러를 닮은 외모와 프랑코가 만든 국민연맹의 후신인 국민당 소속인 점을 묘하게 혼합, 꼬집는 가십성 기사도 그를 속상하게 했다. 반면 곤잘레스 총리는 뛰어난 대중 연설과 당당한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개인적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로 추켜세워져 아스나르의 자존심을 긁었다.
4년 뒤에는 힘겹게 집권했으나 야당은 물론 같은 당내 비판 세력으로부터도 수시로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제1기 집권 4년간 실용주의적 경제정책과 중도 보수 노선으로 인기를 얻고 결국 두 번째 정권 창출에 성공했다. 이제는 옛날을 미소로 회상 할만큼 지지기반도 확고해졌고 여유도 찾았다.
그러나 아스나르 총리의 영광스런 오늘은 마누엘 쁘라가란 노정객 덕이다. 마누엘 쁘라가는 프랑코 총통 생전에 총애받았던 인물이다. 관광장관을 지내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프랑코가 숨지자 쁘라가는 프랑코의 국민연맹을 이어받아 국민당으로 재창당했다.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는 국민당 대표로서 몇차례 총선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패배했다. 90년 총선 직전 고민 끝에 당시 36세에 불과하던 아스나르를 대표로 내세웠고 아스나르는 결국 4년 뒤 국민당을 집권 여당으로 등극시켰다.
쁘라간들 당 대표를 양보하고 싶었을까. 대답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개인적 대권욕을 힘겹게 누른 결과일 것이다. 현재 쁘라가는 고향인 북부 갈리시아주 지사에 당선돼 나름대로 만족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을 한번 대입시켜 보자. 마누엘 쁘라가가 자신이 대권을 잡아야겠다며 계속 펠리페 곤잘레스와 사회 노동당에 도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법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노’다. 쁘라가는 결코 총선 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국민당은 지금까지도 야당으로 남아 있으리라 본다.
이제 한국 정치판으로 돌아가 보자. 요즘 김종필 명예총재가 차기 대선에 후보로 나설 것이란 보도가 종종 나오고 있다. 자민련 소속 의원 등이 ‘JP 대망론’을 자주 입에 올린다. 김 명예 총재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선문답식 발언으로 일관하나 대권 도전의 속내만은 어쩔 수 없이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은 유혹이 있을 때 정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 이는 이한동 총리에게만 해당되는 충고가 아니다. 김종필 명예 총재 역시 자신의 말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김 명예 총재의 최근 행적이 불현듯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를 총리로 탄생시킨 마누엘 쁘라가를 떠올리게 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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