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뉴욕에 와서 맨하탄을 구경할 때 록펠러센터 근처를 헤매다 이상한 이름의 옷가게를 보고 피식 웃은 적이 있다. 다름 아닌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이다. 우리말로 하면 ‘바나나 공화국’이다. 회사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나중에 꽤나 유명한 회사임을 알게 됐다. 지난 78년 캘리포니아에서 창립돼 청바지로 유명한 갭(Gap)사에 인수된 이 회사는 미국 전역에 256개의 매장을 갖추고 있다 한다.
각설하고, 옷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서 ‘바나나 리퍼블릭’이 경제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쏠렸다. 사전을 뒤져보면 “단일 품목 수출에 의존해 경제가 움직이는 나라”라고 되어 있다. 멕시코 이남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산과 들에서 저절로 나는 바나나를 따서 미국에 수출하고 그 수익금으로 경제를 운용하고 있는데 미국인들이 이들 국가를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미국은 최근 유럽국가들이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서 생산되는 바나나 수입을 금지하자 유럽에 통상 압력을 가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에 깊이 개입해왔다.
한국 경제를 바나나 공화국에 비교한다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반도체라는 단일 제품에 의존하는 경제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도체 공화국’이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한국엔 세계 1,2위 반도체 생산업체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옛 현대전자)가 있고 두 회사의 D램 반도체 생산량이 세계 시장의 30~40%를 차지하고 있다. 잘 나갈 땐 반도체 수출이 한국 전체 수출액의 30%를 넘었던 적이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경제는 반도체 경기와 흐름을 같이 했다. 94~95년 반도체 값이 금값이었을 때 한국 경제는 초유의 호황을 누렸다. 반도체가 달러를 벌어들였기 때문에 원화는 달러당 700원대의 강세를 보였고 기업들은 은행 빚을 얻어 흥청망청 써댔다. 그러나 96년부터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면서 한국 경제는 꺾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IMF 위기를 맞게 됐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98~99년 반도체 경기가 또다시 살아나자 한국 경제는 급속하게 회복됐고 IMF 위기 때의 정신을 금새 잊어버렸다. 그러던 반도체 가격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락, 개당 9달러하던 D램 가격이 현재 1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가 제2의 IMF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바로 반도체 위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도체 최대 생산국인 한국이 공급을 조절하며 일정 가격대를 유지할 수 있질 않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렇지만 반도체 공화국과 바나나 공화국은 똑같은 국제가격 시스템에 좌우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바나나 가격은 생산국의 사정보다는 도울(Dole)사 등 미국 대형 식품업체들의 유통마진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미국 식품업체들이 수요를 창출, 공급이 달릴 땐 바나나 가격이 올라가고 미국의 수요가 줄어들면 값이 폭락한다. 가격이 폭락할 때 생산국들이 단결해서 공급을 줄여 가격을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바나나 농장들이 서로 많은 바나나를 팔려고 했기 때문에 비웃음을 사면서도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도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미국 정보통신(IT) 산업이 활황이어서 수요가 급증하면 값이 오르고 미국의 수요가 감소하면 가격이 떨어진다.
그러면 한국의 두 업체가 담합해서 생산을 조절, 가격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회사는 대만을 핑계로 삼고 있다. 한국이 감산하면 대만의 경쟁업체들이 생산을 늘려 세계 시장점유율을 확대함으로써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은 해외에 있는 게 아니라 국내에 있다. 국내에선 삼성과 현대 두 재벌 기업 사이의 치열한 경쟁심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삼성은 자금여력이 있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서라도 생산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회사가 죽길 기다리겠다는 심산이다. 하이닉스는 감산이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혼자서는 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서로 세계 1위라고 자랑할 땐 언제고 감산하는 문제에선 국내 두 업체가 서로를 의식하며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공화국 한국이 스스로 국제가격 조절 체계를 갖지 못하는 한 바나나 공화국과 다를 게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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