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의 신문에서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려운 단어가 ‘우리’(we)라는 단어다. 한국 신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 북한 상선의 북방 한계선 침투기사와 관련된 보도를 보자. ‘우리 해군은 무엇을 했나’ 등의 표현이 많이 눈에 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 신문은 ‘미국 해군’으로 표현한다. ‘우리 해군’식의 표현은 보기 힘들다.
표현상의 사소한 문제 같지만 ‘우리(we) 메시지’ 보도와 3인칭형 보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식 구조의 차이다. ‘우리’라는 1인칭 대명사는 객관적 보도에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다가 ‘우리’라는 개념은 상당히 모호할 때가 많다. ‘우리’라는 표현은 또 편을 가르는 인상도 준다. ‘우리’와 대칭되는 말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불편부당을 지향해야 하는 게 언론이므로 이런 표현을 가급적 피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신문도 한 때 ‘우리(we) 메시지’ 형식의 보도를 많이 했다. 정부와 언론과 기득권층이 스스로 하나로 생각했을 때의 관행이다. 케네디 행정부 시절, 그러니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 주류 신문의 논평이나 기사에는 ‘we’라는 표현이 많았다. 정부와 언론이 한동아리라는 의식의 발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신문은 언제나 기존체제 수호의 편에 서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펜타곤 기밀문서’ 폭로 30주년을 맞아 닉슨 대통령이 당시 보였던 반응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10년 전만 같았어도 이런 짓(닉슨은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로 생각했음)을 할 수 있었을까." 닉슨의 내뱉은 한탄성 발언으로, 이는 언론과 정부와의 관계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제임스 레스턴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 미국의 U-2기가 소련 영공에서 정찰업무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설하지 않았다. 미국의 안보가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관행에 익숙해 있던 닉슨으로서는 ‘우리’라는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 있다고 생각된 신문의 폭로에 일종의 배반감까지 느꼈을지 모른다.
월남전이 이런 관행을 바꾸었다. 뉴욕타임스 등 주류 신문의 정부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갔기 때문이다. 정책 입안자들이 보이고 있는 불성실성, 잘못된 판단 등에 언론이 회의감을 갖게 돼서다. 한마디로 안보에 대해 정부와 언론이 현격한 시각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 때부터 ‘우리(we) 메시지’ 스타일의 보도는 점차 사라지고 미국의 신문은 철저히 스스로의 책임 하에 언론행위를 하게 됐다. 언론과 권력은 말하자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것이다.
한국이 난리다. 정부와 주요 신문들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어서다. 정권측이 언론을 ‘최후의 독재자’로 몰아붙이면 언론측은 ‘막가파 정권’이라고 맞받아 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중립을 표방하는 그룹은 펴느니 양비론이다. 언론이라고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정부가 ‘언론 길들이기’의 책략으로 세무사찰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이런 주장들은 그러나 구두선에 불과한 느낌이다. 보다 근본적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 단초는 아마도 ‘우리(we) 메시지’ 스타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언론 관행, 즉 일종의 집단주의 의식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우리’로 묶여지는 기득권층은 권력과 언론과 재벌로 대표돼 왔다. 적어도 6.29 이후에는 특히 그래왔다. 이 ‘우리’(we)를 이루는 컴포넌트에 그런데 변화가 생겼다. 언론은 그대로인데 권력의 얼굴이 자주 바뀌게 된 것. DJ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변화는 더 현격해졌다. 한 논객의 주장대로 ‘주변세력’이 정권의 중심을 장악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주변세력은 권력을 장악했지만 사회의 중심세력화는 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정부와 언론은 안보관에서 심각한 시각 차이를 보였다. 여기서 갈등은 시작됐다.
그 갈등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극도의 집단주의 발로와 함께 계속 확산되고 있다. 집단주의의 발로는 ‘우리’(we)라는 정의(定意)를 재정립하기 위한 편가르기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독한 말이 오가면서 싸움은 위험 수위에 이른 느낌이다. 본래 동색인 ‘초(草)와 녹(綠)’간의 이권다툼이 아닌 이데올로기 싸움의 형국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딘지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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