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연속 ‘범죄없는 마을’ 화성시 송정2리
송정2리에서는 담과 울타리를 구경하기 어렵다. 방문만 열면 앞집, 옆집 마당이 훤히 보인다. 송정2리 사람들은 정원이 넓다. 담이 없으니 앞산 뒷산이 모두 화단이고 정원일 수 밖에.
경기 화성시 마도면 송정2리 주민은 범죄를 모르고 산다. 송정2리는 법무부가 5월1일 ‘법의 날’을 기념해 뽑은 ‘범죄없는 마을’에 올해로 20년 연속 선정됐다.
법무부가 1981년 처음 선정을 시작한 이래 한번도 거르지 않고 뽑혔다. 송정2리는 27세대 84명이 더불어 사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하고많은 농촌마을 중에 하필 송정2리만 20년 무범죄 기록을 세웠을까.
빈부차 없는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마을 한 편에 있는 ‘공동취사장’이 실마리를 풀어주는 듯하다. 지금은 마을창고로 쓰이는 공동취사장이 세워진 것은 20여년 전이다. 이장 전갑철(55)씨에 따르면 취사장은 공동작업으로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모내기와 벼베기 등 농번기에 공동취사장은 잔칫집이나 다름없었다. 힘든 일에서 제외된 처녀들은 식사당번, 노인들은 뒷치닥거리를 맡았다.
청장년 남녀 주민은 취사장의 지원을 받아가며 들판에서 협업과 분업으로 공동작업을 했다. 모내기 철이면 소를 기르는 사람은 쟁기ㆍ써레질, 청장년 남녀는 무논에서 모를 심었다. 추수도 마찬가지.
공동취사장이 역할을 잃은 것은 농기계가 도입돼 공동작업이 불필요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못자리 작업은 여전히 공동으로 한다. 현재 상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는 공동취사장은 송정2리가 과거부터 특이한 공동체를 형성했음을 알려준다.
송정2리는 옛날부터 대지주도 소작농도 없었다. 지금도 빈부차가 거의 없다. 가구당 30~50마지기 자작하는 논농사가 주업이다. "내 땅에 농사지어 내가 먹고 사는데 싸울 일이 어디있어!" 전갑철 이장의 말이다.
전 이장은 송정2리에서 태어나 여기서 지금까지 살았다. 그는 가구의 대부분이 5~10대째 조상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은 4가구에 불과하다.
안양에서 8년 전 이사왔다는 박예원(65) 할머니는 "모두 형제자매 같아 금방 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도시생활을 싫어하는 남편과 이사 온 박 할머니는 이곳에서 고향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느슨한 종교공동체를 연상케 한다. 20여년 전부터 주민의 절반이 천주교, 절반은 기독교 감리교 신자다. 종교가 없는 유일한 사람은 마도면 노인회회장인 김교덕(74)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가 무교인 이유는 별게 없다.
"애들이나 믿으면 되지, 나까지 뭘." 김 할아버지의 자녀, 손자들은 개인의 뜻에 따라 성당이나 교회에 나간다.
송정2리 사람들은 타종교에 관대하다. 친정이 화성시 서신인 조만순(63) 할머니는 천주교 신자다. 7남매 중 맏딸은 수녀.
주민의 종교가 천주교와 기독교로 나뉘어져 있어 문제가 없느냐는 질문에 소녀처럼 깔깔 웃었다. "종교간에 차별없어요. 신앙은 자유니까." 21세에 시집왔다는 조 할머니는 "42년간 살면서 험한 꼴 한번 본 적 없다"고 말했다. 남편과 포도밭 1,000평을 짓는다는 그의 건강비결은 간단하다.
"마을 사람들과 재미있게 살다보니 이렇게 건강하다."
"우리마을은 남녀평등이야"
이곳도 고령화가 심각하다.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이곳보다는 도시에서 직장 잡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주민은 환갑 이상 노인이 20명, 50대 8명, 40대 10명, 30대 7명 등이다. 박선옥(68) 할아버지는 앞으로 농사일이 걱정이다.
"우리가 늙어 꼬부라지면 젊은이 한 둘이 논을 부쳐지어야 할 거야. 젊은이들이 바깥에서 좋은 직장 잡는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방금 앞산에 다녀온 그는 주머니속에서 고사리를 한 줌 꺼내 놓았다. 이를 본 강신범(64) 할머니가 대뜸 제안을 했다. "우리 산에 고사리 꺾으러 같이 가요. 나는 고사리 나는 데를 몰라서." 이 말에 박 할아버지가 손을 들어 산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산너머에 많아요."
강 할머니는 ‘퍼주는 데 도사’로 통한다. 한 주민은 강 할머니를 가리키며 "입고 있던 옷도 몽땅 벗어줄 사람"이라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10여년 전 옆 마을로 3년간 출근 아닌 출근을 한 적이 있다.
옆 마을에서 남편이 장애인인 아낙이 죽었는데 어린 3남매를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 보다 못한 강 할머니는 3년간 매일같이 그 집을 드나들며 애들을 보살폈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까지 이웃집 남녀끼리의 ‘동네결혼’이 한 번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타지에서 시집온 사람이다. 시집온 여성들은 곧장 마을 분위기에 동화된다.
외지에서 이사 온 가구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것은 이사오는 사람들도 모두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
송정2리는 경로사상이 강한 것으로 소문나있다. 김교덕 할아버지에 따르면 3년 임기의 이장은 마을 노인들이 추천한다. 그렇다고 노인들이 권위적이지도 않다. "우리 마을에서는 노인들 뒷짐지고 ‘에헴’하는 법은 없어요. 여긴 남녀평등이죠." 조만순 할머니의 이야기다.
법무부가 리(里)단위로 실시하는 ‘범죄없는 마을’ 선정은 매년 1~12월의 주민 범죄사실 조회를 통한다. 검찰 지청과 지검의 추천을 받아 법무부가 최종심사한다.
기준은 탄력적으로 적용해 경미한 과실은 심사에서 문제삼지 않는다. 수원지검에 따르면 송정2리에서는 교통사고를 비롯한 경미한 과실도 없었다. 지정된 마을에 대해서는 도청과 시청이 합해 포상금 1,000만원을 지급한다.
송정2리는 지금까지 포상금으로 마을 안길과 농로를 모두 시멘트로 포장했다. 남은 숙원사업은 30여년 전에 지어져 이젠 창고로 쓰이는 마을회관 신축. 회관만 신축되면 노인정을 겸해 동네 사랑방으로 쓸 수 있지만 건립비 5,000만원이 만만치 않다.
술 좋아하는 주민 거의 없어
29년 전 시집 온 이장 부인 신옥순(52) 씨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주민 모두가 3일간 밤을 샌다"고 말했다. 잔치, 생일도 주민의 회식날이다. 주민의 특징 중 하나는 술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10사람이 모여도 2홉들이 소주 2명이 남아돈다는 게 주민들의 이야기다.
주민들은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된 후 더욱 행동을 조심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사소한 말다툼까지 없을 수야 없다. 전갑철 이장은 "이웃끼리 어쩌다 언성을 높일 때가 있기는 하지만 싸움까지 가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날 마침 강신범 할머니의 아들 전종원(31)씨가 고향을 찾았다.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전씨가 집에 들른 것은 며칠 후로 다가온 부친 회갑준비 때문이다.
그는 고향이 20년간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어른이 선생님이죠. 외지에 나가 사는 젊은이들도 어른들에 배운대로, 그리고 고향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항상 조심합니다."
송정2리가 화목을 유지하는 것은 공동작업, 신앙과 관용, 경로ㆍ평등정신, 비슷한 규모의 자작농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이러한 요인들이 전통적 주민 자율규제 체제인 향약(鄕約)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농촌마을과 도시에서 이 같은 공동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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