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 추위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그 시샘이 유난한 듯 하다.
그런 꽃샘 추위처럼 서울과 워싱턴의 외교기류는 냉각됐다. 70년대 말 박정희 정권과 카터 행정부간에 야기된 냉기류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당시 카터는 한국 내의 인권탄압을 문제삼고 주한 미지상군을 빼내가겠다고 박 정권을 위협했다. ‘박동선 스캔들’이라는 악재마저 터져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서울과 워싱턴에 생성된 외교 난기류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타이레놀로 고칠 감기를 폐렴으로 키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다.김대중 대통령이 3월초 워싱턴을 방문한 이후 양측의 긴장은 곳곳에서 목격됐다. DJ와 부시의 만남 이후 사태발전은 ‘밀월’은커녕 ‘반목’의 확대뿐인 듯 감득되고 있다.
양국간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이슈는 ‘북한 정책’이다. 그 이견의 핵은 다름 아닌 ‘김정일과 북한에 대한 평가’다. 김정일에 대한 김대통령의 평가는 한마디로 "믿을 만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북한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스틱보다 캐롯이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이에 워싱턴은 고개를 내젓는다. "결코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북한 인민의 인권을 말살하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독재자다. 그런 자를 다룰 때는 캐롯보다는 스틱이 유효하다. 그럼에도 무엇이 그리 급해 구보로 달려가느냐"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 생각이 옳은가. 필자는 불행히도 워싱턴 쪽에 설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이런 필자의 자세에 "민족 자존도 없느냐. DJ의 발목을 잡는 부시 편을 들다니 배알도 없는 반민족 수구주의자가 아니냐"고 욕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친미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밝혀야겠다. 우리의 존경하는 김대통령 편을 들지 못하는 필자만의 이유는 이렇다.
첫째, 김정일에 대한 평가에 있어 워싱턴 쪽이 보다 엄밀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내렸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누구인가. 6·25를 일으킨 김일성을 뒤이은 세습 독재자다. 아니 그것은 제 선대의 죄악이라 치자.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북한은 아직도 동토의 감옥이다. 김정일은 ‘굿 가이’ 라는 것이 DJ의 시각이지만 아직 그런 평가를 하기엔 이르다.
둘째, 부시 행정부에 대한 서울의 도전적 반응은 자칫 한국의 안보 통상분야에서 심대한 손해를 각오해야 할 위험성이 높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워싱턴을 향해 내뱉은 불만의 목소리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
외교부장관이란 사람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거론된 비밀사항을 발설해 워싱턴을 화나게 한 뒤 "동(東)을 치면 서(西)도 쳐야 한다"는 희한한 말을 남기고는 현직을 떠났다. 집권 민주당의 원내 최고 실력자 한 사람은 워싱턴 한복판에 나타나 부시의 대북 정책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청와대측근 참모 출신인 집권당의 한 초선 의원도 미 의회 요인들 앞으로 e메일을 보내 부시 행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들은 대미 성토가 ‘국익과 자존’을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보다는 ‘정권적 차원의 점수따기 발언’은 아닐까.
한미 외교 마찰은 결코 우리에게 유리할 게 없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민족적 자존을 지키려는 자세는 가상하다. 그러나 힘없는 자존은 실익이 없다. 혹자는 중국의 ‘자존외교’를 보라고 할지 모른다. 부시로부터 "Very sorry"를 받아내지 않았느냐. 우린들 못할 게 무엇인가고 비분강개할 법도 하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자. 갈등의 사안도 그러려니와 한국은 중국이 아니다. 13억의 인구, 북미 대륙보다 큰 국토, 엄청난 부존자원… 중국은 말 그대로 ‘수퍼 파워’다. 그러나 힘이 없으면 그 자존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냉엄한 국제사회의 생존논리다.
셋째, 싸울 것을 갖고 싸워야 한다. 대북 정책은 양측이 예리하게 맞설 성질도, 자존심을 걸고 맞붙을 내용도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서울과 워싱턴의 견해는 기술적 방법론적 차이일 뿐이다. 결코 본질적 문제, 다시 말해서 남북대화를 단절하자든가, 북한을 포위 고립시키자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김정일과 북한에 대한 본질적이고 객관적인 평가 작업을 다시 해 총체적 결론을 내린 뒤 ‘새로운 대북 정책’을 마련해 한미 두 나라가 공조해 나가면 된다. 현재 ‘서울발 평양행 열차’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게 워싱턴의 생각이다.
그런고로 김대중 정부를 향한 이런 충고는 귀를 기울일 만하다. "부시를 화나게 하지 말라. 그를 우리의 확고한 지지자로 만들라. 전통적으로 미국의 공화당 정권은 고립주의를 표방해 온 정권이다. 닉슨식의 신고립주의는 아니더라도 부시가 한반도에서의 디스엔게이지먼트 폴리시(이탈정책) 쪽으로 기우는 듯한 제스처만 보여도, 그 이상 우리에게 타격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는 안 되더라도 미국과 등진 채 과연 우리는 살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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