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원 470명, 운영비 2800만달러의 거대 공연회사
1993년의 어느날 저녁 뉴욕에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은 당시 12세였던 아들 제이크에게 ‘블루맨 그룹(Blue Man Group)’ 공연을 관람하자고 했다. 크고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외계인같은 모양의 세 명의 대머리 블루맨이 진행하는 음악과 코미디의 밤에 호기심이 생긴 부자는 페인트를 튀기고 스스로 만든 타악기를 연주하며 잡다하게 예술과 테크놀러지의 의미를 탐구하고 풍자하는 90분간의 쇼가 끝나고 무대 뒤에서 세명의 블루맨, 맷 골드먼, 필 스탠튼, 크리스 윙크를 만났다. 분장을 지운 세사람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관심사였던, 세계적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도 영혼을 잃지 않을 방법에 관해 4시간동안 토론을 벌였다.
이 문제는 20대 후반의 세 친구가 처음 머리에 파란 페인트를 칠하고 맨해튼의 보도에서 게릴라식 희극 공연을 벌이던 13년전에는 정확히 말로 표현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장난스러웠던 BMG의 아이디어는 후에 세명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맛깔스럽게, 요란하게 터뜨려졌다.
오늘날 BMG 프로덕션은 473명의 스태프를 가진 거대 연극 복합기업으로 뉴욕, 보스턴, 시카고, 라스베가스에서 공연하며 연간 운영예산이 2,800만달러에 달한다. 지난 2월에는 5,500만명 이상이 시청했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도 공연했다.
이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무대 언저리를 맴돌던 청색 삼인조가 라스베가스 럭소 호텔내 1,200석 무대에서 공연하고 그래미상 최우수 팝 악기 부문 지명을 받고 기발한 인텔사의 TV 광고에 출연하는등 전국적으로 존재를 과시하기까지 걸어 온 길은 그들이 단순히 유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희생함이 없이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에 경이롭다. 현재는 여자 1명을 포함, 33명으로 늘어난 3명의 블루맨은 자신들의 창작을 속물화하지 않는
일의 중요성을 절대 잊지 않았다.
블루맨은 1988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비공식적 모임에서 만난 9명의 남녀가 얼굴에 파란 칠을 하고 뉴욕 센트럴팍에서 여피, 코케인, 포스트모던 건축 같은 80년대의 성가신 것들을 장사지내는 의식을 가졌던 것. 현재 각각 39세와 40세인 골드먼과 윙크는 중학교부터 가장 친한 친구로 대학 졸업후 현재 41세인 스탠튼을 만났을 때, 이들은 서로 예술세계의 ‘벤과 제리’, 즉 실험정신을 가진 다양한 플레이어가 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이 자기 세대의 목소리가 될 지 알고 싶었던 세 사람은 영감을 찾아 코도 드럼 연주자들, 바우하우스, 60년대 해프닝, 추상표현주의, 핑크 플로이드, 펑크 록 그리고 버스터 키튼과 막스 형제의 코미디 등 전세계와 전시대를 헤맸다. 그리고 퍼포먼스와 과학에 흥미를 느꼈다.
블루맨에 있어 우연히 정해진 파란색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인원에서 악기 선정까지 지겹도록 분석됐다. 처음에 블루맨은 생명을 가진 회화로 고안됐다. 당시 많은 퍼포먼스 예술은 지루하게 말이 많았다. 초기 블루맨은 가끔 말을 하기도, 안하기도 했다. 말을 멈추면 갑자기 개성이 사라지고 훨씬 더 심오한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대신 블루맨은 관중들에게 예술은 반드시 엘리트 문화여야 할 필요가 없으며 유머는 언어일 필요가 없고 음악에도 멜로디가 요구되지 않으며 오락이 비선형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자극했다.
BMG는 라이브 코미디쇼에 상당하는 퍼포먼스 쇼에서 입지를 다졌다. 돈을 받지 않고 10-20분정도 공연을 하다 뉴욕의 실험적인 ‘우스터극장’에서 한시간 무대를 꾸미다가 앨리 홀의 1,250석이 매진됐던 링컨 센터의 퍼포먼스 예술 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 링컨센터에서 3분간의 열렬한 갈채를 받은 BMG는 오프-브로드웨이 제작자 2명으로부터 재정 지원 제안을 받았다. 3년후 떠나긴 했지만 세사람은 이들이 보여준 무조건적 믿음에 감사한다.
쇼가 히트하자 블루맨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노력은 한때 극장을 채우려고 애쓰던 것 만큼 중요한 생존방식이 됐다. 그래서 케이블 방송, 영화, 광고 등에서 온갖 제안이 들어올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이 "NO"였다. 블루맨을 섭외하려는 쪽은 유명세란 오래가지 않으므로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 해야한다며 그룹을 설득하려고 들었지만 어느 것도 호소력이 없었다. 호프먼은 "상품화보다 독창성을 빨리 죽이는 것은 없다. 제안된 것은 이제껏 해온 작업의 반복이었고 그 같은 반복은 블루맨의 스타일을 죽일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관객이 늘면서 원래 229석의 작은 극장에서 하던 공연은 주 8,9,10회로 늘어났다. 이어 뉴욕 이외 지역에서도 공연이 시작됐고 드디어 자립할 수 있게 됐다. 오프-브로드웨이서의 첫 3년간 세 사람은 대역없이 연속 1,285회의 모든 공연을 해냈지만 1995년 보스턴 공연서부터 다른 블루맨을 무대에 세웠다.
오프-브로드웨이 공연, 블루맨 군단 육성, 라스베가스 공연, 인텔 광고, 음악 CD 마키팅 등이 모두 BMG가 초창기에 표방하던 이념에 어긋나는 증거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인텔 광고는 직접 썼고 이를 30초짜리 영화로 제작, 궁극적으로 BMG 영화를 만들기 위한 연습 기회로 삼았다. 게다가 자신들을 하나의 상표로 보기 때문에 같은 상표이며 걸맞는 짝인 인텔 광고에서 블루맨이 상품을 판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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