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원
LA 코리아타운이 얼마나 쉽게 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의 이름을 알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를 잊지 않은 4.29 (1992년 로스앤젤레스폭동)의 몇몇 좋은 자녀들사이에는 그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다.
9년전 4월 한인타운이 맹렬한 포위공격을 받았던 둘째날 밤, 에디 리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청년이 19살 생일을 24일 앞두고 목숨을 바쳤다.
에디와 다른 3명의 청년들은 위험에 처해있다고 라디오 방송국에 도움을 호소했던 한 한인 상점을 도우려 가다가 교차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두 방어대의 난폭한 총격을 맞고 쓰러졌다. 이 용감한 자원대들이 방화꾼이나 약탈꾼으로 오인된 것이었다. 에디를 제외한 나머지는 살인적인 연속사격에서 살아남았다.
한인타운에서 나서 자란 에드워드 송 리는 1992년 LA폭동에서 유일한 한인 사망자가 되었다. 폭동으로 한인 이민자 1만명의 삶이 유린당했고 2천300여 한인 비즈니스가 파괴되어 시 전체 피해액 10억달러의 절반이나 차지했었다.
에디 리는 4.29폭동의 잿더미를 넘어서 차세대 지역사회 각성이라는 발전된 길을 향해 명예회복의 외로운 존재로 부상했다.
폭도들 공격에 처한 힘없는 동료 이민자들을 방어하려는 에디의 희생은 코리언아메리칸 역사 최대 암흑기에 모른척했던 유학생 출신 한인 엘리뜨들(일부를 제외하고는)에게 침묵, 부끄러움을 갖게 했다.
키크고 잘생겼으며 크게 열린 가슴과 충만한 삶과 웃음을 가졌던 에디는 상존하는 폭력과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고 내버려져 문제성있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했던 행복한 전사였다.
“에디는 총 맞은 후 30여분간 살아 있었지요."라고 그날 밤 치명상을 입고 에디 옆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누워있었던 제임스 강 (18)이 밝힌바 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당시 코리아타임스 주간영문판 기자였던 소피아 김에게 목격했던 것을 말해주었다. “에디는 전사였어요. 죽는 것을 원치 않았지요, 나는 에디를 압니다. 그가 일생동안 투쟁하리라는 것을 여러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당시 지나가던 차안의 한인들은 이처럼 부상당한 젊은이들을 멍하니 쳐다만보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에디를 둔 채 현장을 떠나갔다.
“우리 모두 그를 좋아했지요."라고 제임스 강은 말했다. “그는 달랐어요. 행복한 사람이었지요. 우리가 우울한 기분에 빠졌을 때면 기분을 북돋아주곤 했어요."
에디의 죽음은 피터 리라는 이름의 청년을 자극, 고무시켰다. 그는 마약, 권총, 갱 생활을 성공적으로 벗어나게끔 하는 일에 종사하게 됐다. 아시안갱 멤버들에게 전국적 모범 중재를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다. 갱인식프로그램 (GAP)으로 불리우는 이 프로그램은 한인청소년회관 프로그램의 중추 부분을 이루고 있다.
“폭동이 있던 날 에디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한인 커뮤니티가 바로 눈앞에서 쪼개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라고 GAP 코오디네이터인 피터 리는 회상했다.
“에디는 한인 라디오방송으로 부터 어떤 사람이 그의 가게에 와 도와주길 애탸게 호소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는 커뮤니티를 위해 한 몫 해야겠다고 느껴 그 가게를 보호하려 나갔지요.
“그날 밤 에디는 커뮤니티에 봉사하다 죽었어요. 그는 진정한 영웅이에요. 지역사회와 사람들을 위해 쓰러졌거든요."
피터와 에디의 인연은 한인타운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행복했던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우리 블락에 와서 한국식 경찰과 도둑놀이인 ‘다방구’를 놀았던 생각이 납니다.
“저는 2가와 3가 사이 세라노 길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블락에 스케이터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웃의 모든 아이들이 놀러오곤 했어요.
“그 당시 스케이팅은 아주 인기있었고 우리는 스스로를 ‘빠른 스케이트팀’(RST)이라 불렀지요. RST는 LA에서 가장 큰 스케이팅그룹으로 커졌어요.
“그래서 다른 스케이팅 그룹들과 경쟁을 시작했지요. 나는 RST에서 가장 어린 멤버의 하나였고 에디는 우리 그룹에서 멋있는 사람중 하나였으며 나를 어린 동생처럼 대했어요. 정말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상황이 험해졌던 것으로 피터는 회상했다. “RST의 스케이터들 일부가 크레이지스 갱(CYS)이 되려고 떠났어요. 그때 한인타운의 주요 갱들은 B.K., A.B., K.K., 그리고 U-보이스였어요. 당시 우리는 권총을 가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던 최초의 갱들중 하나였습니다.
“CYS는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얻어멤버가 많았으며 우리만 해도 100여명이나 됐어요. 두 개의 주요 패가 있었는데 코리아타운 크레이지스의 한인들과 메이베리 스트릿 크레이지스의 라티노들이었어요."
갱이란 한 그룹의 친구들이 그들 지역에서 함께 몰려다니며 거친 거리의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충성을 보이는 것 이었다고 피터 리는 설명했다. “나에게는 갱이 된다는게 범죄를 저지르는게 아니었어요."라고 덧붙였다.
“에디는 친구를 위해서 늘 자신을 전부 주었어요. 총을 잘 다루어서 그를 ‘램보’라 불렀지요. 총과 갱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좋은 심성을 가졌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했으며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어요."
불행하게도 많은 갱 멤버들이 마약과 반사회적 활동에 빠져들었지만 “에디는 그런 것에 빠져들지 않았다"고 피터는 말했다.
피터는 에디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지 말았어야 한다고 거듭 말하며, 그의 용감했던 모습이 그립다고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 밖에 없었어요.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데는 단호했거든요."
에디 리의 죽음이 피터 리로 하여금 3년전, GAP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케하는 동기가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 없다고 GAP 창설자요 현재 UCLA법대 2학년인 도 김이 말했다. 에디와 마찬가지로 도 김은 마약과 자살, 갱 총격과 끊임없는 ‘죽은 영혼들’ 세상에서 자라났다. 그곳서 살아남은 도 김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자 4.29폭동의 어려움을 겪은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려고 그의 이웃으로 돌아왔다.
“피터는 매 금요일 GAP 청소년 지도를 도우려 어김없이 왔어요. 처음부터 그는 좀 특별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라고 도 김은 덧붙였다.
에디 다음 대인 피터 리는 청소년들과 곧 좋은 유대를 발전시켰다. 한편 그들은 피터를 존중하게 됐다고 도 김은 말했다.
몇 달 후 도 김은 아메리콥 프로그램에서 받은 기금으로 피터를 어엿한 GAP 코오디네이터로 채용했다. 피터는 GAP를 문제있는 청소년들이 거리의 폭력을 떠나 안전한 공간을 찾고 직업 및 지역사회 서비스를 훈련받게 하는 ‘제2의 가족’이라 부른다.
피터에 대해 도 김은 “그는 라이벌 갱 멤버로 하여금 전선을 허물고 갱 단원들끼리가 아니라 인간으로 서로를 알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조직이나 사업을 일으키는데 큰 일을 하지만 피터는 매일 생명과 죽음의 상황을 다룹니다. 그는 생명을 구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요. 정말 해볼만한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도 김은 요약해 말했다.
지금, 큰 하늘 높은곳에 있는 피터의 큰 형은 그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 생각 든다.
필자는 본보 편집인 이었으며, 현재 UC 시스템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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