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다음은 지난 2월24일, 샌 클레멘티 패시픽 골프 컨트리 클럽에서 있었던 샌클레멘티 도서관후원회 기금모금 오찬에서 언론인 K. 카니 강씨가 연설한 내용이다.
저에게는 매일 하루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에게 삶이라는 선물과 이 위대한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고, 말하고 글쓰며,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값진 기관을 후원하기 위해 공덕심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이 나라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저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옛 이름을 가진, 한국에서 왔습니다. 오늘 저의 일생 여정을 여러분과 나누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저는 로앤젤레스타임스의 기사 자료 수집을 위해 널리 펼쳐있는 로스앤젤레스를 종종 걸음 횡행하면서, 가끔 제 삶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양 관찰하는 기분이 됩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가기도 전에 여러차례 죽음 가까이 가보았던 북한 난민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미국땅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여기자로 어떻게 살게 될 수 있었을까요? 영어가 모국어인 여러분은 아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영어야말로 동아시아사람들에게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입니다.
우리에겐 영어의 L과 R이 혀를 꼬이게 합니다. 구문이라는건 납득도 안갑니다. 문법은 배우기 불가능할 정도이고, 그 모든 법칙들을 배우자마자 모든 예외를 또 배워야 했습니다. 영어로 글 쓴다는 게 악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어를 배운다고 도전하면서 저는 저의 아버님 처럼 셰익스피어와 월즈월스, T.S. 엘리어트가 사용했던 언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성적으로 타고난 저는 아마도 서가에 파묻혀 지내는 도서관 연구 사서가 더 맞았을지도 모르겠는데,껍질을 깨고 나와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항상 말해야 하는 직업을 선택,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스피치를 준비할 때 같이 제 과거를 돌이켜볼 시간이 있을 때면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하신 작업이 얼마나 놀라운지 크게 감명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그 모든 것을 겪은 후 이렇게 살아서 활동하는 게 기적일 뿐 입니다.
저는 미국 신문사 7군데, 캘리포니아에서부터 뉴욕을 커버하는 뉴스 에이전시,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가 몇군데 아시안 언론 기관에서 일했습니다.
이같은 여정은 힘들었으나 상쾌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를 빠져들게 하는 다른 직업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일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100여개 이상 종족과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로스앤젤레스라는 실험실에서 저는 관찰자, 통역인, 번역인, 분석가가 되는 특권을 누립니다記隔걋º 우리의 다양성을 축하하기도 하지만 또한 가슴 아프게 하는 부조화를 대하면 가장 높은 이상주의자라도 냉소적으로 되는 곳 입니다.
어떤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되겠지요: 이 명분은 값어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에게 선물이될 수 있습니다肌痢?¡ 어디서 왔는가에 민감할 뿐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인정을 나누면 서로의 차이점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토끼모양의 한반도 북쪽 끝에 있던 제 조상들의 고향을 떠나 20세기를 마감하는 시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게 된 제 일생은 수차례 멈춤을 겪은 우여곡절의 여정이었습니다.
참으로 굴곡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 적도 있었고 물질적 안락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도처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記愍?¦ 찾아 남하할 때38선을 어렵게 건넜던 일, 한국동란때 폭격으로 옆사람들이 마치 파리처럼 나가떨어지는 와중에서 살아 남았던 것, 밀려오는 공산군을 피해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열차를 지붕에 앉아 타고오면서 추위에 떨었던 일, 일본으로 가는 작은 어선을 타고 폭풍치는 바다를 건너 탈출했으나 어머니와 함께 불법 입국인으로 체포됐던 것 등입니다.
저는 아홉 살에 감옥수가 되었습니다. 팔에 문신을 새긴, 무서워보이는 남자들과 그곳에서 친해졌는데 강인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에게 친절했으며 그들 역시 집에는 저같은 작은 딸이 있는 아버지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감방 마스콧이 되었지요.
어머니의 우려를 자아내리만치 동료 죄수들로부터 카드놀이를 배웠으며 제가 처음 배운 일본말은 문신을 의미하는 ‘이레주미’였습니다. 저와 한방에 있었던 죄수는 창녀로 눈에는 격정이 이글거렸고 눈꺼풀은 녹색으로 칠해져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제게는 친절했습니다. 제가 어머니와 함께 감방에 들어가자 빵 반쪽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제 인생 모자익의 한 부분입니다. 그들 얼굴들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제 마음에서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우리는 감옥에서 불법외국인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치료를 위해 수주일간 병원으로 다시 이동되었습니다.
1952년 가을 마침내 보석으로 풀려나 동경주재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의 극동 사령부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합류했습니다.
저는 일본어, 그리고 영어 습득에 곧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아시안언어인 일본어는 쉬웠으나 영어는 몹시 어려웠습니다.
일곱 살때부터 작가가 되길 원했던 저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인 여성으로 영어 저술가가 된 롤모델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받을 사람으로 펄 벅(훗날 그 많은 지역중 서울에서 직접 인터뷰하게 됨), 한국전을 취재했던 유명한 해외특파원이었던 뉴욕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같은 비한인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고교 2학년이 되면서 학교 신문에서 일하며 저는 신문 기자가 되겠다는 확신을 다졌습니다.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이 세계에서 가장 역사깊고 훌륭함을 알게 되어 그곳에 지원했고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한가지 문제는 제게 미국에 여행할 여권이 없는 것 이었습니다. 일본정부가 우리에게 특별 영주민신분(난민)을 주었으나 제 국적이 한국이었으므로 여권을 발급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독재정권은 그들이 싫어하는 국민에게 여권을 주지 않는 벌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승만 폭정에 넌더리가 난 남한의 학생들이 대거 시위를 일으켜 정부를 무너뜨린 것 이었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신자며 미국서 교육받은 장면씨가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섰고, 저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었습니다. 곧 저는 커다란 팬암 제트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면서 인생의 새 장을 여는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1961년 9월이었습니다.
미국 본토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샌프란시스코였으며 보는 순간부터 그곳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가 제2의 고향이 되어 제 성인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리라고는 그 당시 전혀 알지 못했지요.
저널리즘스쿨 학생이면서 저는 지역 신문에서 일했습니다. 교육위원회 회의와 카운티 법정을 취재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감탄했습니다. 밤늦도록 대중토론을 거쳐 공과 사를 처리하는 미국 방식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 동격인 영어대명사 ‘유’를 다시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졸업후 노스웨스턴대 메딜 저널리즘스쿨에 진학, 석사학위를 받고 1964년 여름 뉴욕 로체스터에서 첫 유급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신문사뿐 아니라 자주 들락거렸던 여러 장소에서 유일한 아시안이었습니다. 업무차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제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해서 저널리즘에 발들여놓게 되었는지를 알고싶어 했습니다. 그들의 호기심 대상이된 것입니다. 저녁식사, 콘서트, 파티 등에 너무나 많이 초대되어 마치 사교계 인사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분주한 사교 일정을 이리저리 맞추며 저는 북한 출신 난민에게 꽤 괜찮은 일 이라 생각했습니다.
미국을 접하면서 제 인생관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개인 취향에 근거해 선택을 내리는 세계에 눈뜨게 된 것이지요. 미국은 저자신의 문화와 가치체계를 판단하는 새 안목을 주었습니다. 아메리카와의 접촉은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내적 혁명을 불붙였습니다. 동등함, 정의, 공평등 미국인들이 당연시하는 개념들이 차츰 제 가치관으로 형성돼 왔습니다. 제가 자라난 뿌리깊은 유교문화에서는 생소한 개념인,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신념을 그 누구못지 않게 강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한국문화에서 모두 낯선 개념이었던 평등, 법원칙, 규칙 및 일 처리 과정의 중요성 등을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만남은 양면적 축복이었습니다; 얻은 것이 많았던 반면 그 때문에 어려움도 겪어야 했습니다.
제가 속하는곳을記隔汰适ö 태평양건너인지璣甦ㅗ歐â 위해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린기자로서 그 다음은 특파원으로서 아시아에 두번 돌아가 살았었습니다.
미국에 많이 동화 되었음을 느끼고, 제 직장일과 미국화로 주류사회에 들어가는 있지만 저는 이민자의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 고향땅의 추억, 선명한 강과 아슬아슬한 산 뿐아니라 가난의 추억도 미국에 가지고 왔습니다. 1천1백만의 한인들이 친척과 이별한채 지금껏 살아오게 만든 한국전과, 심지어 미국에 있는 우리들조차 고국의 친척들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심정을 토로할 수 없었던 30년간의 남한 군부통치로 제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오늘날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인들은 모임을 끝맺으며 어릴 때 배웠던 노래를 부릅니다. 가사 후렴부분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입니다.
소련이 무너진지 오래된 지금 아직도 한반도는 분단돼있고 북한에 있는 수백만의 형제 자매들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 가슴아픕니다.
미국에서 우리 한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만큼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20세기초부터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고,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를 수확하고, 새크라멘토 밸리에서 쌀농사를 지었습니다. 때로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인되기도 했으나 한인들은 열심히 일하며 고국이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면 돌아가리라 꿈꾸며 살았습니다.
한인들의 해외집단인 디아스포라는 1905년 디어도어 루트벨트 대통령의 중대한 결정에서 비롯됐습니다. 일본과의 비밀조약에서 그는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존재를 일본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대가로 일본의 한국과 만주 통치를 허용한다고 동의했습니다.
그 후 50년간 끊임없는 외국의 간섭으로 저와 우리 가족의 삶 뿐 아니라 곳곳에 있는 7천5백만 한인들의 삶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만주, 중국,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고향땅을 떠나게 된 것은 루즈벨트대통령 결정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저의 친할아버지는 한국 해방을 위해 삶을 희생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두 번이나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심신이 망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밤, 그는 잠자면서도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이 북한 난민에게 그것은 상당한 여정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내면에서 여러 문화에 적응하는 정신적 체조를 계속합니다祇㎎灌Â 상반되는 세계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말입니다. 한국과 일본, 미국이 모두 저의 일부분이며 제 아이덴티티는 이 모두가 몽쳐 싸여있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대로 제 삶에서 어려움이 너무 심하다고 여겨질 때면 저는 오스왈드 체임버스의 다음 말들에 의지합니다:
“하나님 영의 강은 모든 장애를 극복한다. 결코 장애나 어려움에 안점을 두지 말라. 단순히 근원에 초점두어야 함을 명심하라. 그러면 너를 통해 꾸준히 흘러내리는 강물에게 장애란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가지 이유로 이 인생행로에 있습니다. 우리의 도전은 그때 그때 상황에 맞서 일어서는 것입니다綺泳宕涌“Ô 투자하고, 다른 사람이 짐지고 가는 것을 들어주고, 우리의 재능과 시간, 자원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린 축복을 해아리고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 있으라.
K. 카니 강씨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자이고 그의 저서, ‘내 고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 코리안 아메리칸 집안의 대하전기’를 1995년에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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