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눈빛과 몸짓 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수준이 되려면 상당한 공력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공력은 일정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 할리우드의 톱 클래스 배우들이 서른을 넘긴 나이에야 자리잡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예쁘다고 모두 배우가 되는 건 아니다. 스타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래서 ‘배우’는 ‘스타’ 위에 있다. 최근 배우 한 명이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심은하다. 눈빛과 몸짓 만으로도 여러 감정을 노래할 능력을 갖게 되자마자 그는 아쉽게도 스크린 뒤로 숨어버렸다. 그러면 심은하가 차지했던 공간을 메울 여배우로는 누가 있을까. 더욱 아쉽게도 극히 적다.
전도연이 고군분투하고, 이영애가 뒤늦게 탄력받은 정도다. 그러나 20대 초중반 세대에 기대주는 많다. 그들이 심은하 공백을 급속도로 메우길 바랄 뿐이다.
●엽기적으로 매력넘치는 전지현 전지현은 황신혜 같은 유형의 미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매력넘친다. 이제 갓 스무 살의 전지현이 배우가 되기 전에 벌써 스타가 된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그는 다행히 작년 가을의 <시월애>에서 배우의 가능성을 살짝 내비쳤다. 그리고 만난 작품이 <엽기적인 그녀>(신씨네, 곽재용 감독). 이제야 연기를 좀 하게 됐고, 스스로의 매력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났으니 전지현으로선 <엽기적인 그녀>가 배우로 가는 관문인 셈이다.
전지현의 장점은 풍부한 감성. <시월애> 촬영 현장에서 전지현은 카메라가 원하는 감정을 쉽게 끌어올리는 능력을 과시했다. 그 감성에 깊이를 더하는 날, 전지현은 비로소 배우가 될 것이다.
●드문 캐릭터와 자세의 배두나
배두나(23)의 출발 지점은 모델이었다. 거기서 활동 반경을 TV 드라마로 넓혔고, 작년에는 <플란다스의 개> <청춘> 등의 스크린까지 진출했다.
배두나는 또래 연예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와 자세를 지니고 있다. 그 점이 배두나의 최대 장점이다. 그는 젊은 날의 최진실 같은 느낌이 풍긴다. 그러나 최진실의 유연성, 튀는 맛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남다른 캐릭터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기 자세 또한 다르다. 어린 여자 연예인들이 인기에 쉽게 현혹되는 반면 연극인 어머니를 둔 덕택인지 배두나는 ‘연기’와 ‘작품’에 매달린다. 노출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이 인기 전선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영화 <청춘>에 출연한 것은 기특함을 넘어 놀랍다.
그래서 배두나의 다음 출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마술피리, 정재은 감독)가 기대된다.
●오! 수정같은 이은주 <송어> <오! 수정> <번지 점프를 하다>를 거치는 동안 이은주(21)는 범상치 않은 배우가 됐다. 수정처럼 차가운 이미지의 그는 연기력으로 이를 극복해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따뜻한 감성을 선보였다. 그가 세 작품만으로도 어엿한 배우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다.
그의 장점은 독특한 ‘선구안’에 있다. <오! 수정>의 주인공 자격으로 칸 영화제의 붉은 주단을 밟은 직후 그가 고른 작품이 <번지 점프를 하다>이다. 거기서 그는 영화의 절반 분량에만 얼굴을 내민다. 주·조연 여부와 공헌도를 따지는 어린 연예인이라면 당연히 택하지 않았을 배역이다.
하지만 그는 칸 영화제가 주는 흥분과 환상을 억누르고 ‘작품’을 택했다. 선구안이 좋다는 증거.
●배우가 되고 싶은 열망의 장진영 모델 출신의 장진영(27)은 다른 기대주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다. 그래도 그는 기대주다. <자귀모> <반칙왕> <싸이렌>에서 그가 보여줬던 가능성은 컸다.
이젠 그 가능성을 꽃피울 차례. 오는 5월 개봉 예정인 심리 스릴러 <소름>(드림맥스, 윤종찬 감독)이 그 기회다. <소름>에서 그는 진정한 ‘배우’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장진영은 당초 <소름> 출연을 망설였다. 그가 주문받은 역은 밑바닥 삶을 사는 이혼녀.
아직 보여줄 다른 모습이 많은 상황에서 한참 뒤로 미루고 싶은 배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긴 망설임 끝에 결국 출연했다.
자신이 보여 줄 모습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연예인에게 필요한 자세일 뿐 배우로선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각성 때문이었다. 이 각성 하나만으로도 그는 배우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치열하면서도 낙관적인 이지현 이지현(24)의 행보에선 치열함이 엿보인다. 데뷔영화 <미인>에서, 스타를 꿈꾸는 누드모델 역의 TV드라마 <순자>까지 그가 선택했던 캐릭터가 내뿜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실제 모습은 매우 털털하다. 낙천주의까지 엿보인다.
고교 졸업 후 패션모델로 잠시 활동하다 배우가 되고 싶어 영화사를 찾아가고, 그 영화사에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하자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던 데뷔 이전의 행보에서도 그의 낙천주의는 그대로 드러난다.
목표를 향한 치열함에 우회할 줄 아는 여유까지 겸비한 것은 도드라지는 장점이다.
<미인> <7인의 새벽> <순자> 등 세 번의 연기 기회밖에 갖지 않은 그는 아직 미숙하다. 하지만 털털하게 "제 연기, 아직 멀었죠?"라고 반문할 줄 알기에 가능성이 크다.
정경문 기자 moonj@dailyspor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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