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 주필의 서울에서 만난사람<3>
▶ 노태우 전 대통령
노태우 전대통령은 일부 국민이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방문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처럼 이룩된 남북 화해무드가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보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6·25와 KAL의 피해자들은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려면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만약 김정일이 그것 때문에 서울방문을 취소한다면 그것은 국가 이익을 그르치는 것이므로 지금은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가 처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의 6·25전쟁 사과 없는 서울 방문은 강력히 반대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었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은 YS의 상도동 자택보다 조용했다. 노 전대통령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이렇게 돼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구속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는 DJ보다 YS에게 더 섭섭한 표정이었으며 YS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특별 인터뷰는 지난 9일 이루어졌으며 청와대 정무수석이었으며 공보처장관을 지낸 손주환씨가 배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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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 것 같던데요.◇ 6공시절 인사들과는 자주 만납니다.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바쁩니다. 신문사에서는 북방정책에 대해 인터뷰하자는 요청도 있지만 일절 사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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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 재임시절 가장 괴로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5공청산이었습니다. 5공청산은 6·29선언에 담긴 민주주의 실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도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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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에 보낸 것 말입니까?◇ 그렇죠. 당시 사회분위기는 눌렸다가 터지는 분위기여서 5공의 모든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하나의 물결이었습니다. 전경환씨 문제부터 터져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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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기 전 두 분이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까?
◇ 했죠. 내가 "참으로 미안하게 됐다. 지금은 불가항력의 상황이나 원상복구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더니 "나라가 잘된다면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대답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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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한 친구였었고 후임자로 추천까지 받을 정도로 가까웠는데도 못 봐준 이유가 뭡니까?◇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우정이 두터웠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달라요. 그 사람이 대표하는 시대가 있고 나는 나대로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 올라가니까 우정의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특히 여소야대의 당시 정국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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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두분 관계가 어떻습니까? 회복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냉랭합니까?◇ 개인적으로는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 분도 나의 당시 입장을 이해합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씨가 백담사로 떠나면서 형제가 모두 구속되어 집안에 제사 지낼 사람이 없었다고 한 말에 노태우 대통령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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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어떤 이유로 YS가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된 것입니까?◇ 그 분도 나를 많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너무 독단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당시의 국민의 바람은 다음 대통령이 군인 아닌 민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군에 몸을 담았던 이종찬씨가 불리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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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씨를 대통령후보로 지지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김영삼씨 집권말기에 국가경제가 파탄이 나고 IMF가 찾아오니까 내가 YS 지지한 것이 국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디다. 그러나 내가 청와대를 떠날 무렵의 여론추세는 김영삼씨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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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개혁도 그랬고 YS의 개혁도 그랬고… 왜 모두 실패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 서둘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면 개혁에서 오판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정권에서 뭔가 이루려고 하니까 부작용이 나는 겁니다. 좋은 예가 삼청교육대입니다. 당시 국민들도 깡패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는 것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삼청교육대는 잘못된 개혁이라는 것이 후일 증명되었습니다. 너무 서둘러서 그런 잘못이 저질러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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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라는 이름과 6·29선언은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는데 6·29선언을 언제 결심하게 된 것입니까?◇ 87년 6월10일 힐튼호텔에서 열린 나의 대통령후보 지명 축하파티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차 안에서였습니다. 남대문에 데모대와 개스가 가득 찬 것을 보고 "변화가 있어야겠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거기서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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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전두환씨 측근들은 6·29선언 구상이 전두환씨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어느 말이 맞습니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마치고 온 후 내각책임제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나는 6·29선언 내용을 결심했으나 대통령인 전두환씨에게 직선제를 건의했다가는 거절당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당의 이만섭 총재,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 종교계의 김수환 추기경과 만나 나의 결심을 비쳤습니다. 모두가 적극 찬성이었습니다. 김 추기경은 "마음을 비우는 사람은 축복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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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분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정계 지도자와 종교계 지도자들이 전대통령을 만나 직선제 여론을 전하고 전대통령이 후보인 나와 다시 의논하는 형식을 취한 것입니다. 6·29선언 결심은 제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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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선언을 한 당사자가 구속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속되지 않았으면 역사적인 평가도 달라졌을 텐데요?◇ 나는 그 점에 대해 국민들에게 전직 대통령으로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나의 불행은 역사 발전의 하나의 과정입니다. 어제의 관례가 오늘에는 나쁘다고 해석될 때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나로서 이런 불행은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측근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을 개인이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그 증거로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은 전액 은행통장에 들어있었던 것을 지적한다. 빼돌리려면 분산시켰지 통장에 고스란히 넣어 놨겠느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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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나의 7·7선언(공산국가와의 외교 개방)에 대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에서 "한국과의 경제개선도 가능한 일"이라고 간접 회답을 한 것에서 감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나려고 했는데 고르비 쪽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선정한 것입니다. 소련은 북한의 눈치를 굉장히 살피더군요. 그래서 만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장소도 미국으로 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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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와 무슨 이야기 나누셨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 만난 자체가 동서해빙이 아니냐 이제 결실을 거두자고 했더니 고르비는 "익지 않은 과일을 먹으면 배탈납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한국이 이제 먹읍시다 하면 그 과일은 익은 것"이라고 대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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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에서도 남북 정상회담 시도가 있었습니까? 당시 비밀접촉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양쪽 총리가 8번이나 왔다갔다하면서 만나 ‘남북기본합의서’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에 이르러서는 남북합의서 내용에 대해 일언반구도 않더군요. 다행히 엊그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남북관계 정책은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할 것이라고 밝혀 전임 정권의 업적을 인정해 줍디다. 햇볕정책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 아닙니다. 그 전부터 추진되어와 이제 꽃을 피운 것입니다. 올림픽 개최도 북방정책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구 공산국을 불러 접촉하고 그 다음 그들이 북한을 설득한다는 순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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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이 서울 온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6·25피해자들은 김정일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있습니다. 사과해야 된다는 거죠. 그러나 "사과 안 하면 오지 말라"고 말하면 모처럼 이룩해 논 남북 화해무드가 깨질 것입니다. 어느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대통령은 항상 국가 이익부터 생각해야 하니까 숲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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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을 쓰고 계신다면서요?◇ 쓰고는 있는데… 요즘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YS의 회고록을 말하는 듯)을 둘러싸고 하도 말이 많아 출판 날짜는 미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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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분들과 만나면 요즘도 파티에서 베싸메무쵸를 부르십니까?◇ 전에는 즐겨 불렀는데 청와대 시절 어느 보좌관이 "이제 베싸메무쵸 그만 부르시는 게 좋겠습니다"해서 그 후로는 잘 안 불러요. 88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가 저의 새로운 1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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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미국 동포들을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미국 방문했을 때 열렬히 환영해 주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동포들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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