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지 한분은 요즘 ‘저녁’이 괴롭다고 했다. 2001년 새해부터 저녁 설거지를 돌아가면서 하기로 자녀들과 약속을 했는데 설거지 당번이 너무 빨리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딸이 설거지 스케줄을 냉장고에 붙여두고 매일 체크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일주일에 이틀 저녁 설거지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40년 살도록 ‘집안일’이란 걸 모르다가 자녀들 등살에 시작해보니 “주부들이 얼마나 고될지 이해가 된다”고 했다.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쓰레기 치우고, 마당에 물주고… 안하면 표가 나도 한 표시는 안나는 일, 집안일이란 재미로 하기는 힘든 일이다. 어른도 하기 싫은데 아이들은 오죽 할까. 주부들이 모이면 자녀들 집안일 시키는 문제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아들에게 쓰레기 치우는 일을 맡겼더니 쓰레기통만 길가에 덜렁 내놓고 집안의 쓰레기는 그대로 둬요. 잔소리하다 지쳐서 내가 직접 방마다 다니며 쓰레기를 모아요. 앓느니 죽지요”
“아이가 설거지하기 기다리려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설거지를 해도 그릇들이 너무 더러워서 아이 잘때 내가 다시 씻어요. 그렇게라도 시켜야 가족으로서 의무며 책임감을 배울 테니 답답해도 참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 10대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국에서 자라며 설거지 한번, 청소 한번 안해본 사람들이 많다. 당시 중산층 가정 대부분은 어머니가 전업주부인데다 가정부가 있었고, 아이들은 입시경쟁이 치열해 공부외에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자녀들이 너덧살만 되어도 집안일을 돕는 것이 가정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전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 섭섭하다. 최근 타임, US뉴스 & 월드리포트등 잡지들은 “아이들이 집안일을 너무 안한다”는 걱정 섞인 칼럼들을 연이어 실었다. 관련 연구를 보면 9살에서 12살 어린이들의 집안일 돕는 시간이 20년전만해도 평균 주 5시간이 넘었는데 근년에는 3시간42분으로 줄었다. 12학년대상 연구에서는 집안일을 거의 매일 한다는 학생이 지난 76년 41%였으나 99년에는 24%로 줄었다.
학생들의 공부 부담이 커진 탓도 있지만 아이들이 너무 자기 중심적이어서 부모가 시켜도 안하고, 몇번 잔소리하다 안되면 부모들이 포기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너무 물러진 것은 한국가정이나 미국가정이나 마찬가지의 문제다.
시카고에 도어티라는 여교사가 있었다. 지금은 은퇴한 이 여교사는 매우 열심이어서 그가 담임을 맡은 반은 항상 최우수반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해 담임을 맡은 6학년 학급은 예외였다. 너무 시끄럽고 산만해서 통솔이 안되었다. 그는 “학생들중 상당수가 학습장애아인가 보다”생각하고 교장실로 몰래 들어가 아이들의 IQ 기록을 훔쳐보았다.
도어티선생은 깜짝 놀랐다. 아이들 대부분의 지능이 평균이상이고 1/4은 IQ가 120을 훨씬 넘었다. 130대도 몇 명 있었고, 제일 말썽꾸러기 중의 하나는 IQ가 145였다.
“이렇게 뛰어난 아이들에게 너무 쉬운 것만 가르쳤으니 수업이 될 리가 없지” 생각한 그는 그때부터 어려운 공부를 시키고 숙제를 잔뜩 내주고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는 학생에게는 엄하게 벌을 주었다. “너희같이 우수한 아이들은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6학년이 끝날 때쯤 되자 학년초 말썽꾸러기들은 품행이나 학력에 있어서나 모두 최우수 학생들로 바뀌어 있었다.
교장은 기뻐서 도어티선생을 불러 비결을 물었다. 도어티선생은 할수없이 학생들의 지능기록을 훔쳐본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교장은 흔쾌히 용서를 하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학생들 이름 옆에 있던 숫자는 IQ가 아니었어요. 락커 번호였지요”
아이들은 자신에게 걸린 기대만큼 성장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실제 이야기이다.
부모의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 선긋기이다. 뚜렷한 원칙으로 자녀들에게 규율의 선을 그어주고, 자녀들이 도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목표의 선을 높이 그어주는 것이다. 부모가 기대하는 바를 분명히 하면 자녀는 결국 따라오게 되어있다. 집안일이든 학과공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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