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 눈이라도 펑펑 쏟아 내릴 것 같이 낮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한겨울 어느 날. 공연히 가슴 한끝이 시려와 더 서러운데, 하늘을 닮은 뽀얀 입김만 영혼의 숨결인양 가슴을 헤집고 뛰쳐나와 허공에 하얗게 묻어난다.
한적한 교외. 숲이 끝나는 곳에 외로운 고택(古宅) 한 채 뎅그런데… 그것을 부둥켜안은 퇴락(頹落)한 낮은 토담 끼고 돌아서면, 조락(凋落)한 낙엽마저 깡그리 북풍에 휩쓸려간, 을씨년스레 휑한 폐허. 눈을 들면 앙상한 나목(裸木) 끝의 잔가지들이 텅 빈 하늘에 실루엣 되며 희뿌옇게 망막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든다.
인적마저 끊긴 이 황량한 폐허… 그 속에 숨쉬는 만상이 한겨울 지독한 고뿔에 시달리는 어린아이의 가쁜 숨결 마냥 뜨겁게 고독을 거푸 토해낸다. 이제는 너무 까마득해 상처조차 감미롭게 기억 속에 재생되는 젊은 날의 그 숱한 가슴앓이-- 불안, 좌절, 그리고 끝없는 방황. 숨가쁘고 어지럽게 돌아가던 젊은 날의 그 까닭 모를 슬픔, 지독한 방황이 꿈결처럼 기억의 늪 저쪽에서 처연하게 손짓한다.
이제는 그 숱한 방황에서 돌아와 이 황량한 폐허에 홀로 서면, 지난 세월이 성난 벌떼처럼 윙윙거리며 기억의 뇌리 속을 헤집고 마구 뛰쳐나와 새하얀 눈송이 되어 주변에 내려앉는다. 체념이 몸에 밴 삶. 돌아와 인생의 강가, 삶의 여울목에 서서 물처럼 흘러간 세월을 젖은 눈빛으로 뒤돌아본다.
겨울은 만상이 얼어붙어 삶의 템포가 느슨해지는 계절-- 모든 게 서두름 없이 정체(停滯)된다. 무릇 숨쉬는 모든 것들이 동면(冬眠)하는 계절-- 벌레들도 짐승들도 땅 속으로 기어들고 씨앗들도 숨죽인 채 꼼짝 않고 웅크린 채 지낸다. 아이들도 추위를 몸으로 겪으며 뼈마디 사이의 연골이 얼어 성장을 멈추고, 만상이 움츠린 채 북풍의 사나운 포효(咆哮)에 숨죽여 봄을 기다린다.
온 천지를 하얗게 뒤덮는 눈은 우리에게 조용하고 단순한 삶을 무언으로 암시한다. 지표를 온통 뒤덮는 순백(純白)의 눈은 우리에게 서두름 없는 삶의 여유를 가르쳐준다. 산하가 온통 백색으로 뒤덮인 단조로움 속에 우리는 삶의 단순함과 투명성, 거기 더해 침묵의 의미를 음미하며 일체감에 깊숙이 녹아든다.
휴일의 늦은 아침, 밖은 아직 온통 얼어붙은 채 미동(微動)마저 없는데, 잔온(殘溫) 서린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시 즐기는… 아, 이 분에 넘치는 아침 한때의 게으름! 이 느긋한 여유, 이 사치스러움으로 해서 우리는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겨울만이 우리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넉넉한 은총이요 윤택함이다.
사람들은 겨울이 부재한 상하(常夏)의 기후를 동경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겨울철이 빠진 한해는 겉으로는 안일한 삶일 수 있지만 영혼의 속살을 살찌우는 삶은 결코 겨울과 무관하지 않다. 겨울이 쏙 빠진 채 손꼽는 한해는 옹근 한해가 아니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헐렁한 인생이다. 겨울철 북풍의 맵고 거친 숨결,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삶과 성취를 향한 강한 손짓이요 의지의 결정(結晶)이다.
산하를 온통 하얗게 덮으며 기척 없이 내리는 눈. 사철 푸르름을 간직한 전나무 가지, 잎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낙엽수 가지에 흰눈이 쌓이고 지붕도 뜰도 길도 온통 백색으로 옷을 바꿔 입으면 마음은 한없이 맑고 여유롭게 열리고, 우리의 잠들었던 의식도 그것을 가두는 딱딱한 각질을 깨고 뛰쳐나와 흰눈 덮인 산하를 너풀거리며 자유롭게 떠돈다.
겨울은 진정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계절, 겨울이 빠진 한해는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일 뿐이다. 진정 겨울은 도전이요 삶이라는 이름의 일품요리에 첨가된 맛깔스런 조미료요 활력소이다.
한겨울 펑펑 쏟아 붓는 눈발과 매서운 북풍은 여름내 더위에 시달려 후줄근해진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일깨우고 소생시킨다.
눈은 소리 없이, 기척도 없이 내리지만 어느새 만상을 덮고 대지를 단숨에 품어 안는다. 겨우내 대지는 포근한 흰눈을 뒤집어쓴 채 그 밑에서 소리 없이 은밀하게 봄을 잉태하는 작업에 열중한다. 언 땅 속에서 침묵으로 웅크린 채 씨앗은 연한 싹을 팍팍 터뜨리는 황홀한 연초록 꿈에 취하고, 알뿌리들은 눈 속에서 연한 꽃나무 줄기를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내밀(內密)한 작업에 분주하다.
흰눈을 담요처럼 뒤집어쓴 땅 속으로부터 생명이 이렇게 추운 몸으로 우리들 품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다. 침묵의 엄청난 아우성으로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다. 사람들은 겨울이 죽음의 계절이라 말들 하지만, 아니다, 겨울 대지야말로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기 위해 저 차가운 눈, 얼음장 밑에서 산고(産苦)하며 신음하는 거대한 태반(胎盤)이요 생명의 모체이다.
바람 찬 언덕에 이름 없는 한 떨기 들풀의 연한 싹을 틔우기 위해, 아니면 아직 잔설(殘雪) 희끗희끗한 대지를 뚫고 연한 대포딜(daffodile) 싹이 고개를 올려 밀도록, 눈 덮인 언 땅 속에선 지금쯤 생명이 바쁘게 꼼지락거리고, 북풍은 밤새 그 발톱을 세워 저리 서럽게 잉잉거리며 내 침실 창문을 마구 흔들어대는가!
아직 북풍의 거친 숨결이 산하를 핥고, 한설(寒雪)이 시린 손길로 대지를 온통 선득하게 더듬는데, 봄을 해산하는 신음소리가 먼 듯 가깝게 우리들 귓전을 맴돌고 있다. 봄이 잰걸음으로 달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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