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이쯤 되면 이부자리 속 빠져 나오기가 입에 든 사탕 뱉기만큼이나 곤혹스러웠다. 문풍지가 삭풍에 몸부림치고 외풍에 코끝이 싸하던 그 시절의 겨울아침은 밤새 데워진 솜이불의 따뜻한 유혹 때문에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꽁꽁 언 등교 길, 그래도 벌겋게 조개탄이 달아오를 땐 얼었던 손발 따라 마음도 덩달아 녹았지만 겨우 도시락 몇 층을 데워준 뒤 검버섯 피듯 서서히 재가 되고 나면 긴 겨울날의 오후는 유난히 춥고 쓸쓸했었다.
식어 가는 난로에게서 얼핏 무상한 인생을 보았던가. 겨울밤 이불 속 같은 어머니 자궁, 아침 추위에 던져지는 시린 출생, 짧지만 찬란한 조개탄의 황금빛 열정, 그리고는 결국 재가 되기까지 천천히 온기를 잃어 가는 긴 이별의 전주... 단순히 계절 탓인가, 생명의 끝을 향해 휘우뚱 걸어가는 노년의 뒷모습에 자꾸만 성에가 어리는 것은.
이별은 감기와도 같은 것.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불쑥 찾아드는 거랑 참아내는 것 외에는 달리 치료약이 없는 점, 게다가 면역성이 없는 것까지 우연히도 둘은 닮은꼴이다. 가벼운 고뿔서부터 지독한 독감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해서 그저 좀 섭섭한 정도의 고뿔형 이별도 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누군가를 보내야 하는 그야말로 뼈마디 쑤시는 독감 같은 이별도 있다.
돌아올 수 없는 강... 때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 강물에 뗏목을 띄우고 차츰 시야에서 멀어지는 걸 그저 안타까이 바라봐야만 할 때가 있다. 육체적으로는 분명 아직 우리들 곁에 머물러있지만 영혼은 이미 강을 떠난 사람들, 아무리 외쳐 불러도 속절없이 자꾸만 멀어지는 사람들. 작아지는 그들의 영상을 담아두기엔 우리 안의 그리움이 너무 크지 않은가. 노인 요양병원에서 만난 그는 과거 유명한 목사요, 작가였다. 그런데 왜 그의 잿빛 눈을 줄곧 들여다보면서도 마치 벽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까.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다독이고 등을 쓸어주었을 그 손은 이제 누구에게도 따뜻한 악수를 청하지 못한다. 심하게 떨리는 손을 이쪽에서 먼저 잡아주어도 자신이 애써 전해왔던 이웃사랑을 더 이상 마른 손에 담지 못했다. 이미 자신이 누군지, 또 사랑이 뭔지를 잊었으니까.
그 때만해도 단지 남의 일이었다. 노인들의 삭정이 같던 쇠잔한 육신도, 또 건네 준 꽃을 뜯어먹던 그들의 온전치 못한 정신도 그저 그런 장소에 으레 있음직한 풍경이었을 뿐. 그런데 연전에 적어도 내 식구에게는 요행히 비껴 갈 것 같던 생로병사의 고리가 어림없다는 듯 덜컥 친정어머니를 물었다. 그리고는 하루아침에 언어를 빼앗아간 그 솜씨로 야금야금 그녀의 주름진 육신과 겁먹은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
"할머니, 왼손을 들어보세요." 간단한 의사의 지시에도 갈팡질팡하는 어머니를 보고 마음 약한 언니는 와락 눈물을 쏟았단다. 말씀은 못하셔도 그간 가족들과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해왔는데 실제로는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은 건 아닌 듯 싶다. 우리가 빠른 영어를 군데군데 놓치고도 차마 되묻지 못할 때가 있는 것처럼. 갈라진 뒤꿈치를 숨기려 병석에서도 양말만은 꼭 챙기시던, 그리고 흰머리가 궁상스럽기 전에 언제나 염색을 부탁하던 그분은 가족들에게조차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으셨나보다.
그런데 두 번째 입원을 하시고는 방문하는 가족들조차 그다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단다. 모름지기 여자는 가꿔야 한다면 평소 화장기 없는 내 얼굴을 못마땅해 하시더니 이제 당신은 세수할 의욕조차 없어 재활치료 자체가 어렵다. 사실 정작 내가 두려워하는 건 쇠약해지는 그녀의 육신이 아니라 이미 흐려지기 시작한 정신인 셈인데 실제로 그녀는 이제 미국에 떨어뜨려 놓은 딸이랑 손녀 걱정까지도 멈춰버렸다. 끝내 느끼고 생각할 능력을 잃고서야 겨우 자식들 걱정을 놓는 어머니란 존재가 서럽다.
남인수 노래를 좋아하셨던가? 생각나는 대로 어머니의 삶을 되짚어보는데 문득 가지런한 이를 들어내며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흑백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종종 꺼내보며 흐뭇해하시던 발랄한 처녀 적 모습. 그래, 그녀를 위한 생기 불어넣기는 그 빛 바랜 사진으로부터 시작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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