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져만 있던 우리 이민역사의 새로운 뿌리가 21세기의 여명과 함께 그 실체를 한 꺼풀씩 드러내고 있다. 미주 이민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이민역사 발굴 및 편찬작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미주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이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던 콜로라도주 덴버가 이제야 하와이, 멕시코, LA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후대의 의식 있는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조국을 잃은 설움의 격변기 때 자주독립의 신기루를 쫓아 이억만리 미국 땅에 발을 내린 초기 이민자들의 족적을 기리기 위해 ‘덴버, 그 잊혀졌던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본다.
한인이 덴버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하와이에 102명의 이민자를 태운 갤릭호가 닻을 내린지 불과 2년 후인 1905년께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덴버에 첫 발을 디딘 한인은 최근 들어 이승만, 안창호 선생과 함께 미주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박용만 선생과 그의 숙부였던 박희병(미국에서의 이름은 박장현) 선생이었다. 이 두 사람중 누가 먼저 미국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다소 시각의 차이가 있지만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입국, 얼마안가 덴버에 자리를 잡았다는 데는 별반 이견이 없다.
당시 이들이 왜 번화한 샌프란시스코를 뒤로한 채 황량하기 이를 데 없고 탄광 이외에 이렇다할 산업도 형성된 것이 없던 덴버를 정착지로 선택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기념사업회는 그 실마리를 박희병 선생의 행적에서부터 풀어간다. 강원도 철원 출생인 박희병 선생은 서울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주 로아노크 대학에서 공부한 개화사상의 유학파 엘리트. 1895년 미국회사가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을 받을 당시 통역과 영미관계 외교부문 일을 맡아보았다. 이후 외부(외교부)에서 관리로 일하던 그는 상동감리교회에서 추진하던 멕시코 유카탄반도 노예이민 사기사건 진상조사의 책임을 맡고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국에 다시 왔다. 박희병 선생이 실제 멕시코에 들어가서 조사활동을 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귀국을 하지 않고 덴버에 터를 잡은 뒤 유니언 스테이션 앞에 직업 소개소와 전부여관이라는 숙박업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를 쫓아 미 대륙을 전전했던 사람은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씨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동지들을 네브래스카 등지에 자리잡도록 도와준 박용만 선생이 덴버에 가게된 것은 숙부 때문이었다. 덴버에서 숙부와 재회한 박용만 선생은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입국한 한국인들을 광산과 철도회사에 소개시켜 줬다. 이때 이들의 소개로 한인들이 취업했던 곳은 와이오밍, 유타, 캔사스주 등지로 알려져 있으며 숫자는 최소 수십명에서 100여명에 이를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기념사업회와 학자들은 두 사람이 이렇게 사람을 모아 덴버를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하려 했던 것은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의도는 1903년 하와이에 이민 와 한인 최초의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던 윤병구 선생을 덴버로 끌어들이면서 점차 표면화됐다.
약 2년 동안 한집에서 기거하던 세 사람은 마침내 미주내 애국동지들의 힘의 규합을 시도했다. 1908년 7월 덴버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게 되자 박용만, 이관용 선생 등은 하와이와 미 서부지역의 동지들에게 서신을 띄워 ‘전당대회와 시기를 같이해 조국독립의 결집된 의지를 미 전역에 알리자’는 의미심장한 제의를 했다. 이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덴버에 모여든 동지들은 모두 36명. 김헌식, 문양목, 백일규, 신흥우씨 등이 당시 참석자로 기록돼 있다.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라는 이름으로 연석회의를 가진 참석자들은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군사학교를 세우자는 데 뜻을 함께 했으며 당시 덴버지역 미국 일간지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기사를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보도했다.
애국동지 대표자회의는 우리 해외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다. 우선 시기적으로 상해 임시정부나 안창호, 이승만에 의해 주도됐던 LA, 하와이 지역의 독립운동 보다 훨씬 앞선다. 또 단체와 의식의 차이를 극복하고 조국의 자주수호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의식을 갖고 미주 전역에 흩어져 있던 애국지사들이 만사를 제쳐두고 대부분 참여한 것은 덴버가 한 지역에 국한된 지엽적 독립운동을 펼쳤다기보다 미주 전역의 규합된 운동세력을 지향했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게다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딘지 얼마 되지 않은 구한말 인사들이 민주당 전당대회와 때를 맞춰 행사시기를 설정하고 약 6개월 전부터 초청장을 발송하는 등 치밀한 준비성을 보인 것은 지금의 우리들도 좀체 하기 힘든 깨인 시각을 가진 진보의식의 발현이었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박희병 선생은 이 역사적인 회의가 열린 1908년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길잡이가 되어줬던 숙부를 잃은 박용만 선생은 애국동지 대표자회의에서 결의된 군사학교를 세우기 위해 1909년 덴버를 떠나 네브래스카로 향했다. 그는 네브래스카주 커니에서 박초후, 임동식, 정한경씨의 도움을 받아 무장 독립운동의 첨병격인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웠다. 학교 운영경비는 그 곳에 세운 농장의 수입과 오마하, 링컨 등지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단체들의 성금으로 충당했으며 군사훈련에 사용된 총기와 훈련장 시설은 미 정부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덴버의 독립운동 기지화 움직임은 박희병 선생의 죽음과 박용만 선생의 이주로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시들기 시작하더니 1910년 1월 덴버 남쪽 220마일에 위치한 프리메로 광산에서 발생한 한인 광부 집단매몰 사망사고 이후 급속도로 쇠퇴했다. 구전에 따르면 이 무렵 덴버를 이탈한 한인들 중 일부는 박용만 선생을 따라 네브래스카 쪽으로 이주했고 또다른 일부는 샌프란시스코와 프레스노등 서부 해안지역으로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못다 핀 덴버의 초기 이민역사는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결국 막을 내리고 1950년대를 지나 현대 이민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루게 된다.
기념사업회는 비록 덴버가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 도시로 만개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기념비적 비중을 지니고 있고 박희병-박용만-윤병구씨를 중심으로 한 애국동지들의 진취적인 활동은 미주 이민역사와 해외 독립운동사의 한 축을 이루기에 충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 발굴과 고증의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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