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메고 탄광 매몰사고
▶ 개스폭발 외국인 75명 사망
지금부터 91년전인 1910년 1월31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남쪽으로 220마일정도 떨어진 스미스캐년의 프리메로 탄광(Primero Mine)에서는 한국인을 포함한 76명의 광부들이 탄광속에서 채굴작업에 벌이고 있었다. 오후 4시30분이 되었을 무렵 주 출입로인 메인노스(Main North) 입구에서 ‘꽝’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탄광입구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흙더미로 꽉 막혀버렸고 채굴작업을 벌이던 광부들은 칠흙같은 어둠과 공포감에 휩싸인채 몸부림치다 결국 목숨을 잃어갔다.
이날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실종 75명. 생존자는 단 1명뿐이었다. 사망·실종자들은 오스트리아인이 34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인은 9명, 그밖에 크로아티아인 6명, 멕시코인 5명 등으로 외국인이 절대 다수였다. 사고발생 7시간30분만에 유일하게 구조된 멕시코출신의 레나도 버진은 같은해 2월3일자 덴버타임스에서 사고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한국인 광부들을 일본인으로 잘못 알고있었다. ‘A-7광구에서 작업을 하던중에 폭발이 일어났다. 바로 옆 작업실에서 일하던 일본인 5명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있었고 몇분동안 불안한 목소리로 쉴새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눴다. 일본인들은 막힌 출구앞에 쓰러진채 숨을 거뒀고 나도 그 옆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사망자들의 시신은 신원확인절차를 거친뒤 10여마일 동쪽의 트리니다드시로 옮겨졌다. 장례는 2월2일 엄수됐다. 트리니다드시는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외국인인 점을 감안해 출신국의 예식대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한국인 희생자들의 경우는 유가족들이 모두 한국에 있고 예식을 집전할 사람도 없었던 탓에 장의사에서 수소문끝에 동원한 몇몇 한국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간단하게 치뤄져 묘지(Knights of Pythias Cemetry)에 안장됐다. 1910년 2월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제171호)는 ‘동포 9인 참사’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사고소식을 전했다.’우리동포 아홉사람이 비참한 일을 당하여 세상을 영결한지라 슬프도다. 만리이역에 돌아가지 못한 혼을 위하여 일반동포가 비통한 도례를 표하며 향리친척에게 부음을 전하노라.’
존 D. 존스 콜로라도 주 탄광검사관은 사고발생 약 한달뒤인 2월26일 발표한 사고원인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사고원인을 개스폭발 또는 광부들이 다루던 화약에 불이 붙어일어난 사고로 추정했다. 존스 검사관은 ‘탄광 내부에 발화성 개스를 함유한 석탄먼지가 많지 않았더라면 그같은 대형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고당일 탄광내 먼지를 없애기위한 수분공급이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정확한 사고원인을 결론짓거나 희생자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91년전 조국이 일제에 의해 쓰러져갈 당시 하와이나 샌프란시스코도 아닌 덴버에서도 220마일 떨어진 황량한 록키산맥속에서 석탄채굴작업을 하던 광부들은 누구인가.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덴버 프로젝트를 맡고있는 모연호씨는 "지금까지 광부들의 유입경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증명된 것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들어온 유학생과 취업희망자들이 구한말 외교관을 지냈고 1905년 덴버에 정착해 동포들에게 직업을 알선해줬던 박희병씨의 소개로 광산에 취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박희병씨는 1895년 미국 광산회사가 운산금광 채굴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통역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모씨의 이같은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모씨에 따르면 1900년대 콜로라도와 와이오밍, 유타, 캔사스주에 퍼져있던 광부는 1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국실정을 감안할때 광부들이 개별적으로 미국에 건너와 삼삼오오 모여 취직을 했다기보다는 1908년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를 계기로 미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한 덴버를 중심으로 조직적 취업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같은 가설이 사실이라면 1910년이전에 왕실과 당시 여권발급기관이었던 수민원-배편이 닿는 샌프란시스코-덴버를 연결하는 모종의 미국 이주루트가 형성돼있었고 이 루트를 통한 조직적 이주가 하와이와 불과 몇년 차이로 이뤄졌다는 말이 된다.
기념사업회측은 이들의 유입경로와 목적등은 비록 확인되지 않고있으나 이들의 희생이 일제에 의해 은폐 또는 축소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즉 미국측은 사고직후 한국인 광부들의 죽음을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알렸으나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덴버지역에 독립투사들이 정착해 있고 또 보상문제등을 떠안게 되면 재정적인 부담을 지게될까봐 사고현장에 가지도 않고 사고와 한국인 광부들의 희생자체를 조용히 덮어두려 했다는 주장이다.
서동성 실행위원장은 "1905년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상살한 우리나라로서는 아까운 인명들이 무더기로 목숨을 잃었어도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면서 "수모와 치욕의 역사속에 잘못 쓰여진 것이 있다면 바로잡고 늦게나마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정당한 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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