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은 미국 경제에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부담이 되는가’ 해묵은 질문이다. 경제가 나쁠 때면 부담이 된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운다. 경기가 좋으면 이민자에 대해 미국 사회는 관대해진다.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이민문제가 다시 클로즈업 될 조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과거 역대 공화당 행정부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이민 문제에 대해 상당히 온정적인 입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 행정부의 노동장관으로 지명된 린다 차베스가 90년대 초 불법체류 과테말라 여인을 불법 고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물러났다. 차베스는 이렇게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불법체류자 여인을 결코 외면할 수 없어 도움을 주었다" 차베스 케이스는 바로 불법체류자, 더 나아가 이민 문제 전체에 대해 미국 사회가 보이고 있는 갈등의 축소판으로 보여진다.
말하자면 불법 이민은 막아야 되지만 일단 미국에 들어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도울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양면성의 태도다. 이같은 양면적 입장은 미국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얼굴의 전통에 기인하고 있다. 법치주의에 충실한 미국의 전통이 한 얼굴이다. 또 다른 얼굴은 미국은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전통이다.
이민자, 특히 불법체류자에 대해 ‘법치주의 전통의 얼굴’이 강조됐을 때가 90년대 중반이다. 1994년 당시 피트 윌슨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프로포지션 187을 등에 업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주민발의안은 불법체류자 자녀 공립학교 등록을 금지하는 초강경 반이민 발의안. 또 연방의회는 의회대로 아주 엄혹한 반이민 법안을 제정했다. 합법 이민자들에게도 푸드스탬프와 현금지급 프로그램등 웰페어 혜택을 봉쇄하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더 가혹한 법안은 범죄자 추방 법안이었다. 중범죄자는 물론이고 경범을 저지른 이민자도 법을 소급 적용해 추방 할 수 있는 법안도 제정된 것이다.
이같은 반이민 정서 확산과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민자 혜택을 사실상 봉쇄하는 법안을 주도한 세력이 보수 공화당이었다는 사실이다. 피트 읠슨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잘 알려진 골수 보수파 공화당원이다. 또 연방정부 차원에서 웰페어 개혁을 주도한 세력도 이른바 ‘깅그리치 공화당’으로 불리는 공화당 내 우파다.
이민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태도는 이 시점을 고비로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법대로’의 법치주의 전통의 차가운 얼굴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 호전이 이같은 변화의 주 요인이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오늘날 4만여 농장 노동자중 절반이 불법체류자다. 과거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매년 미국으로 들어오는 합법 이민자수는 80여만을 헤아린다. 불법 입국이나 비자 유효기간이 지나 주저앉는 케이스 등 불법 이민자수는 연 30여만으로 추산된다. 이같이 러시를 이루고 있는 이민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최근의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44%의 미국인은 이민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해롭다고 보는 사람은 40%. 지난 93년에는 26%만이 도움이 된다고 응답했고 64%는 해가 된다고 보았다.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 편차는 이민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식이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진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합법 이민자에 대해서도 항상 적대적 시선을 보여온 그룹이 미국의 노조였다. 전국산업별노조는 이민자들을 미국 근로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항상 인식해 왔다. 이같은 노조의 인식마저 변했다. 전국산업별노조가 불법체류자 근로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기업계의 무드도 친이민 일색이다. 장기적 호경기 탓이다. 가령 600여만으로 추산되는 불법 체류자들이 어느 날 모두 추방됐다고 치자.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미국의 일부 산업은 마비상황을 맞게 된다. 농장, 식당, 호텔, 봉제업 등은 당장 난리다. 일손이 없어서다. 고급 기술을 요구하는 하이텍 분야도 이민 노동력이 없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지난해 공화당 주도 연방의회에 하이텍 업계가 고급기술 이민 쿼타를 배로 늘려줄 것을 요구한 것은 바로 모자라는 인력을 충당키 위한 것이다.
이같이 이민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미국 사회의 태도는 양면적 입장으로 바뀌고 있다. ‘법대로’에서 ‘이민의 나라라는 전통의 얼굴’로 강조점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변화는 정치권에도 파급됐다. 민주, 공화 양당은 새로운 미국시민의 표, 다시 말해 이민그룹의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저마다 안간힘을 써왔다. 올 대선에서 히스패닉 표를 의식, 공화당인 조지 W, 진영이 벌여온 선거전략이 바로 그 예. 부시는 이 전략에 힘입어 31%의 히스패닉의 표를 끌어 모았다.
공화당 하면 반이민 정서의 정당이라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전통적으로 각종 반이민 법안 입법의 주도세력이 공화당 우파였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당선은 이와는 정반대 입장인 공화당내 친이민 계파의 승리를 의미한다. 공화당내 우파가 ‘반이민 세력’이라면 조지 W. 부시가 주축이 된 중도계는 ‘친이민 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이민그룹 인권옹호 세력은 불법체류자 대사면등 보다 획기적인 이민관계 법안 제정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 사회가 이민그룹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공화당 의석수가 줄어 의회는 민주, 공화 양당으로 반분됐다. 거기에 새로 들어서는 부시 행정부도 결코 반이민 세력이 아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어 타이밍만이 문제가 된다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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