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삶에서 자신을 확립시키거나 변화시키는 획기적인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그런 일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40년, 열살 때 미국에 온 것이었다. 만약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내 운명이 어떠했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아마 십대에 일본군에 징집돼 태평양전선에서 미군과 싸웠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사건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나 생소했던 미국땅 시카고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고생했던 그 삶의 여러 상황을 목격했던 점이다.
세 번째는 아내 이 숭옥과의 연애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것 이다.
1954년 3월, 미해병대 군복무를 끝내고 일리노이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할 참이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가을학기 등록을 위해 일리노이주 샴페인에 갔고 그곳에서 숭옥을 처음 만났다.
한인저널리스트 선구자요 한국일보영문판 전편집장이었던, 여러분들에게는 KW로 알려져있는 이경원씨가 그 무렵 몇해전, 저널리즘을 공부하러 아틀랜타로 가던 길에 시카고를 지나게 되었다.
이른 아침 7시경이었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한국음식을 너무나 갈망해 평소의 분별력은 잠시 접어두고 그는 시카고한인감리교회로 전화를 걸었다. 교회목사와 사모가 제공하는 좋은 음식과 환대를 그는 익히 듣고 있었다.
목사에게 차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다운타운 기차역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가 받은 환대와 한국음식이 너무나 따뜻하고 정성어린,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어서 이경원씨는 언젠가 그 친절함에 보답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우리가 일리노이대학 캠퍼스에서 만났을 때 나에게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것을 해주길 원했다; 그는 내게 아주 특별한 여성을 소개해주겠노라고 말했다. 모든 걸 사전에 잘 주선해놓을 터이니 내가 어떤 장소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곳은 그녀의 기숙사였다.
예정된 시간에 나는 새침뜨기 한인 대학원생을 만나리라 기대하고 그 장소로 갔다. 그 당시 여성들은 데이트에 가려면 옷을 잘 차려입었다. 그러나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입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머리에는 컬 도구가 꽂혀있었고 데이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경원씨가 그녀에게 나에 관해서나 데이트에 대해 이야기해놓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상관없이 나에게는 굉장해보인게 정말 이상했다. “첫눈에 반한다"는게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내가 받았던 한가지 인상은 그녀가 자신감에 넘쳐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첫 데이트에 어떻게 그런 모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알고 보니 그녀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날 저녁, 데이트하러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게 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중서부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름방학에는 일자리를 찾아 시카로로 왔는데 숭옥도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시카고에 살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뒤늦은 교제를 가졌다.
우리는 비교적 나이가 들었다. 숭옥은 한국에서 이화여대를 졸업했고 나는 군 복무와 대학 2년을 마쳤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자세가 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어머니는 숭옥을 만나기 오래전부터 내 장래 아내감에 대해 한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이화여대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훗날까지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사실 나는 모르는게 많았다. 예를 들면 한국전이 터지기 전에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온 숭옥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의사였다는 것을 한동안 모르고 있었다.
어바나-샴페인에서 나는 공대가 가까운 캠퍼스의 동쪽에 살았고 숭옥은 예술대학이 가까운 서쪽에 살고 있었다. 일(끼니를 버는)과 공부를 끝낸 후 저녁에는 아무리 늦었더라도 캠퍼스 안뜰을 건너 숭옥과 소중한 시간들을 가졌다.
내게 오래 기억되는 그녀에 관한 인상들이 많다. 한 번은 피크닉에서 모두가 음식과 병에 든 음료수를 가지고 왔다. 그 당시에는 손가락으로 따서 여는 캔이 없었으므로 병따개가 꼭 있어야 했다. 아무도 병따개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숭옥이 해결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빨로 병뚜껑을 열었던 것이다. 여성이 그런 일을 하다니 얼마나 잔인한가라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른다. 나는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을 해결했다.
또 다른 경우는, 추운 겨울비속에서 시카고로 운전해가다가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차선이 여러개인 고속도로에서 북향 차선에서 몇차례 회전한 후 넓은 중앙 분리대를 지나 남향 차선에서 겉잡을 수 없이 돌아서 마침내 눈 쌓인 큰 더미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여러차례 차가 도는 동안 차가 뒤집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첫마디가 나더러 괜찮으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끌지 않고 청혼을 했다. 그녀는 거절했고 나는 울었다. 그러나 내게 미안한 감이 들었던지 마침내 승낙했다. 우리는 1954-55학년도 두 학기 사이에 시카고에서 결혼했다. 지금 1남1녀 두 자녀가 있으며(모두 변호사로 한명은 노스웨스턴 법대, 한명은 하바드 법대를 나왔다) 손주가 5명인데 모두 우리집 가까이에 살고 있다.
우리가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이유의 하나는 비록 어려웠으나 둘다 모두 대학을 끝낸 것이었다. 나는 테크니션으로 만족하고 살 수도 있었으나 숭옥은 내가 학교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숭옥은 두 아이를 돌보고 부모님의 교회일을 도우면서 풀타임 직업을 가졌다.
내가 졸업한 후 숭옥은 두 아이와 함께 샴페인으로 가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마쳤다. 그 당시 그녀는 도서관학 학위를 받은 세번째 한국인이었다.
우리가 서로 편한 사이였던 것은 상통하는 점이 많아서였다. 무엇보다 사회봉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 이었다. 둘 다 스포츠와 정치를 즐겼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 타인과의 교류를 즐겼다는 점 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다른 좋은 일들을 가져다 주었는데 모두가 결혼전에 학교친구였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것 같다.
내가 교회 행정위원장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회의가 우리집에서 개최되었고 배우자도 모두 초대되었다. 내가 숭옥에게 그리 해달라고 청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렇게 해야 함을 그냥 알아차리고 실천했다. 편안한 분위기로 회의는 더 많은 결실을 얻어냈다.
숭옥은 스코키공공도서관에서 23년 일했다. 그 당시 그 곳은 일리노이주에서 시카고공공도서관 다음으로 가장 크고 좋은 도서관으로 알려져있었다.
숭옥은 도서관 테크니컬 서비스부를 책임지는 부도서관장이었다. 이 도서관에직원이 100명이며 그중 9명이 한인인데 숭옥이 이들을 채용했다. 도서관장은 숭옥의 사람보는 눈과 도서관 운영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오늘날 (도서관장이 86세다), 이들은 여전히 계속 교류하고 있다. 명절이나 생일때면 그녀는 우리집에 꼭 초대된다.
4년여간 나는 일리노이주 수도인 스프링필드에서 일리노이주 교통국의 소수민족 컨트랙터 및 컨설턴트를 위한 연방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첫해에는 시카고 교외의 우리 집에서 200여마일 거리를 왔다갔다했다. 매 주말마다 있는 이같은 부담을 덜기위해 숭옥은 골프코스 한복판에 있는 무척 사랑하는 아름다운 우리집에서 스프링필드로 이사하는 용단을 내렸다.
지난 해 시카고에서 이화국제재단 30주년 연례회의가 있은 후, 장상 이화여대총장이 숭옥에게 “시카고 이대동창회 회원들이 모두 당신을 칭찬하며 이대 동창의 좋은 모범이 된다고들 말합니다. 당신이 행한 모든 것에 내가 깊이 감사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겸손과 헌신이 모든 이화 가족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숭옥은 정말 내 어머니의 평생 꿈을 채워준 것 이었다.
우리는 여러 단체에 속해있는데 그 대부분이 우리가 발족시켰고 숭옥이 그 모임의 심장과 영혼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골프그룹 크리스마스파티는 우리집에서 개최된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4인조 고정멤버를 위해 숭옥이 스낵을 챙긴다. 아침 7시에 티오프를 함으로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70대이지만 정신적으로,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서로가 편안하고 주변에 친구, 친척이 많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정말, 축복받았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배우자를 사려와 위엄을 가지고 대하고 모든 면에서 자기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하고 당연한 경의를 가지고 존중할 때에만 모든 사람이 훌륭한 인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훌륭한 친구가 돼 주었고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품으로 사회생활, 전문직업인 생활에서 받았던 존중에 대해 만약 내가 숭옥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나는 태만한 인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작고한 아버지께서 그가 복종하고 사랑한 하나님과 함께 나를 칭찬하실 거라고 내 영혼 깊숙히 느낀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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