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된 장마 때문에 전국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지난해 여름 한국에 있는 한 대표적인 박물관의 관장 앞으로 한 통의 E-메일이 들어 왔다.
발신자는 미국인이었다. 미국에서 살며 공부도 하고 박물관에서 일한 적도 있어 미국에 지인이 적지 않는 이 관장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케빈 링컨?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링컨 대통령의 증손자쯤되는 사람인가? 어찌 되었든 메일 내용은 매우 흥미 있는 것이었다. 케빈 링컨과 집안끼리 친분이 깊어 의형제를 맺었던 한 노인이 최근 샌프란시tm코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이 노인은 평생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가족도 없이 혼자 살면서 돈을 벌어 모두 옛날 동전을 사 모으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고인은 평생을 동전 수집가로 산 셈이었다. 그리고 고인이 모은 동전의 절대 다수는 고대와 중세 한국에서 만든 희귀한 고동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노인 일가는 할아버지대부터 동전수집을 해와 노인이 보유한 한국관련 동전은 싯가로 따져 1천만달러를 홋가하는 규모였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기 전 이 노인은 주위사람들에게 수집한 동전의 전부를 한국에 있는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전을 고인의 유일한 혈육인 이복여동생이 유산 관리인의 자격으로 경매를 통해 처분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매를 법원이 이미 승인한 상태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박물관이 서둘러 손을 써 이 불행한 사태를 막기 바란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케빈 링컨 자신은 의형제로 정이 나누었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 싶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박물관을 찾는데 겨우 성공했노라고 했다.
관장은 당장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전을 찾고 싶었다. 이 동전은 지금 누구 손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의 암흑시대에 해외로 무단 유출된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 더구나 고인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겠다지 않는가? 관장은 곧바로 메일 내용의 진위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이 노인이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고, 고독한 만년을 동전과 함께 보내다 어느 날 불꺼진 아파트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 고무적인 뉴스가 박물관 서류철에 있었다. 전임관장 재임시 박물관은 한 통의 타자로 친 편지를 고인으로부터 받았다. 자신이 수집한 동전 일체를 자신이 사망한 후 이 박물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한 내용이었다. 노인의 서명도 들어 있는 편지였다. 박물관측은 전임관장의 명의로 수락의사를 노인에게 보냈다는 기록도 갖고 있었다.
처음 E-메일를 보냈던 케빈 링컨이 다시 연락을 했다. 고동전 일체를 이 박물관에 기증하겠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언장에는 서명이 없었다. 법률적 효력이 없는 유언장이었다. 고인와 증인의 서명이 들어 있는 유언장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박물관은 박물관대로 여러 채널을 통해 고인이 죽기 전 일했던 변호사들과 차례로 연락했다. 그렇지만 역시 법률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찾을 수 없었다. 고인은 타자로 친 편지에서 박물관에 상속 의사를 밝힌 바 있고, 서명이 되어 있지 않지 않다고 하지만 유언장을 찾았고,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한국에 있는 박물관에 동전 전체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주위사람에게 밝힌 바 있는 상황에서 동전에 대한 상속권을 박물관이 주장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안타깝게도 박물관이 동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유언장이 효력을 발효하려면 고인이 생전에 직접 손으로 유언장을 썼거나, 유언장에 본인과 두명의 증인이 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편지가 유언장으로 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필로 써야 했다. 그런데 편지는 타자로 쓰여져 있었다. 관장은 그런 상황에서 동전 경매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승산이 없는 유산 분쟁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문제의 동전은 고인이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고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어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전부 고인의 이복여동생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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